국보순례(國寶巡禮)

[스크랩] 제78차 文化遺産踏査; 昌德宮-後苑-昌慶宮(4-4); 昌慶宮-景慕宮址

含閒 2018. 11. 28. 10:53

 

78차 文化遺産踏査; 昌德宮-後苑-昌慶宮(4-4); 昌慶宮-景慕宮址

 

昌慶宮  -史蹟 제123-

昌慶宮은 成宗 14(1483) 당시 세 분의 大妃인 世祖 妃 貞熹王后 尹氏, 德宗 妃 昭惠王后 韓氏,

睿宗 妃 安順王后 韓氏를 위하여 太宗이 世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壽康宮(世宗 1/1418 창건) 자리에 세운 宮闕이다.

昌慶宮은 昌德宮과 연결되어 東闕이라는 하나의 宮域을 형성하면서 자체로도 궁궐로서

필요한 空間構造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弘化門에서 법전인 明政殿까지는 昌德宮보다

격이 낮게 조성되었다.

거리가 짧고 중간의 門도 생략되고 軸도 南向이 아닌 東向을 하고 있으며, 外殿과 闕內各司는

빈약한데 반하여 內殿과 생활 주거공간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창경궁은 壬辰倭亂(1592)으로 불에 타 光海君 8(1616) 重建하였으나 仁祖反正(1623)

仁祖 2(1624) 李适의 亂으로 燒失되어 仁慶宮의 건물을 移建 하였으며, 純祖 30(1830)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高宗 14(1877) 수리하였으나 純宗 3(1909) 북쪽에 植物園,

남쪽에는 動物園이 들어서고 놀이터로 개방되면서 궁궐은 많이 훼손되었으며 1911

日帝에 의해 昌慶苑으로 명칭도 格下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昌慶宮이라는 이름은 되찾았으나 빼곡하게 들어찼던 건물들은 더 이상

찾을 길 없이 현재의 창경궁은 受難과 일부 復元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昌慶宮은 작년 4월 제62차 때 踏査했으므로 通明殿에서 弘化門으로 나가는 動線 上에 있는

文化財만 走馬看山格으로 보았다.

 

 

昌慶宮 사진

 

 

(121) 昌慶宮 通明殿 쪽으로 들어간다.

 

(122) 通明殿 오른쪽 측면에 있는 蓮塘 (*: 연꽃 연 *: 못 당)

通明殿 오른쪽(서쪽)에 돌난간을 만든 연못과 둥근 花崗石을 두른 샘으로, 건물 뒤쪽에 꾸민

庭園 한층 더 情感 있는 풍경으로 만들고 있다.

 

(123) 蓮塘의 샘

通明殿 뒤 우물에서 샘솟는 물이 蓮塘을 가득 채우고, 다시 明堂水처럼 月臺 앞을 돌아

빠져나간다.

肅宗 27(1701) 就善堂(지금의 樂善齋 부근)에 머물던 肅宗의 嬪 張禧嬪이 그 서쪽에

神堂을 꾸미고 仁顯王后의 처소인 通明殿 아래에 凶物을 묻고 밤마다 무당을 불러들여

災殃을 빈 것이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巫蠱의 獄). 王妃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결국 張禧嬪(본명 張玉貞)도 賜藥을 받고 죽었다.  (*: 뱃속벌레 고)

 

(124) 昌慶宮 通明殿  -보물 제818-

昌慶宮의 寢殿으로 內殿의 중심건물이며 왕의 생활공간으로 宴會場所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成宗 15(1484) 創建했으며 壬辰倭亂으로 불에 타 光海君 때 重建했으나 正祖 14(1790)

다시 燒失되어 純祖 34(1834)에 再建하였다.

건물 앞에는 넓은 月臺를 쌓고 드므도 설치하였으며 마당에는 薄石을 깔아 通明殿의 格을

높였다. (*: 엷을 박)

앞면 7옆면 4칸 팔작지붕으로 궁궐 안 內殿 중에서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昌慶宮 內殿의 중심건물이며, 王妃의 寢殿이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125) 養和堂

昌慶宮을 창건할 때 건립된 殿閣으로 通明殿의 동쪽에 있으며, <養和堂> 堂號는

四佳亭 徐居正이 지었으며, 편액은 純祖의 御筆이다. 通明殿에서 생활하던 內命婦의

首長들이 接待空間으로 사용한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光海君 8(1616)에 再建했으나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純祖 34(1834)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丙子胡亂 때 南漢山城으로 避亂했던 仁祖가 還宮하면서 養和堂에 寄居했으며,

高宗 15(18789) 哲宗 妃 哲仁王后가 昇遐한 곳이다. (*: 멀 하)

*內命婦: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品階를 받은 女人을 통틀어 이르는 말. , 貴人,

            昭儀, 淑儀, 昭容, 淑容, 昭媛, 淑媛, 尙宮 등이다.

 

(126) 景春殿

경춘전은 大妃 寢殿으로 成宗 15(1484)創建했으며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純祖 34(1834)再建하였다.

王妃 産室로도 쓰여 正祖 憲宗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正祖는 자신의 탄생을 기념하여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쓴 御筆 현판을 걸었다.

世祖 夭折 長子 德宗(諡號) 成宗 母親 昭惠王后 韓氏(仁粹大妃),

肅宗 繼妃 仁顯王后 閔氏 正祖의 母親 惠慶宮 洪氏 이곳에서 昇遐했다. (*: 멀 하)

<景春殿> 扁額은 純祖의 御筆이다.

 

* <宮闕志>正祖 태어나기 전날 밤 惠慶宮 洪氏 꿈에 한 마리가 景春殿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라에 큰 慶事 생길 徵兆라고 동쪽 壁面 꿈에 본 용을 손수

   그려놓았다는 逸話 실려 있다고 한다.

 

(127) 歡慶殿

成宗 14(1483) 昌慶宮을 창건하면서 임금의 寢殿으로 歡慶殿이 건립되어 通明殿, 慶春殿,

養和堂과 함께 창경궁의 內殿을 구성하는 殿閣이다.

壬辰倭亂 때 화재로 전소되어 光海君 8(1616) 재건하였으나 論功行賞에 대한 불만으로

일으킨 仁祖反正의 主役 <李适의 亂> 때 불에 타 1633년에 復元하였으나 純祖 30(1830)

昌慶宮 大火災로 다시 소실되어 1833년에 復元하였다.

건물은 3단의 基壇을 쌓고 정면 7측면 3칸 팔작지붕의 正南向 건물로, 中宗과 昭顯世子가

昇遐한 곳이기도 하다. (*: 나타날 현)

환경전 앞에는 恭默閣이라는 行閣이 있고 주변에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의 본채만 남아 있으며, 건물 뒤 북쪽은 여러 大妃들의 寢殿이 밀집해 있었으나 빈터로

남아있다. (*: 잠잠할 묵)

 <歡慶殿> 扁額은 純祖의 御筆이다.

 

                 

              (128) 昌慶宮 五層石塔

        歡慶殿 앞쪽에 있는 昌慶宮 五層石塔은 1915년 日帝强占期에

        朝鮮總督府의  ‘朝鮮物産共進會행사를 위하여 징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高麗時代 中期 이후의 작품으로, 樣式으로 보아 忠南이나

        全北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佛敎界에서는 抑佛崇儒政策의 朝鮮宮闕에 불교 문화재인 石塔이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2014년부터 이 석탑을

        奉恩寺로 移轉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奉恩寺 측에서 五層石塔의 所藏處라는 것을 立證하지 못하고,

        五層石塔은 1930년대부터 현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歷史性을 갖고 있으며, 奉恩寺로 이전 후 원래의 소장처가 확인되면

        논란이 커질 수 있어 五層石塔은 昌慶宮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문화재관리위원회와 文化財廳)

 

(129) 涵仁亭에서 잠시 쉬면서 해설을 듣는다. (*: 젖을 함)

 

(130) 涵仁亭 쪽에서 景春殿과 歡慶殿을 바라본다.

 

(131) 涵仁亭  (*: 젖을 함)

이곳에는 원래 成宗 때 지은 仁陽殿이 있었으나 壬辰倭亂으로 燒失되었으며, 仁祖

丁卯胡亂(仁祖 5/1627)으로 江華島 避亂했다가 昌慶宮으로 돌아와 仁祖 11(1633)

仁王山 아래 仁慶宮 있던 涵仁堂 移建하고涵仁亭이라고 命名했다.

임금이 便殿으로 즐겨 사용하던 곳으로 英祖가 이곳에서 文武科에 及第한 사람들을

접견했다고 한다. 純祖 30(1830) 창경궁 大火災 全燒되어 1833년에 重建하였다.

아홉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려한 丹靑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예전과 달리 壁體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南向 건물이다. 뒤쪽에 恭默閤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쪽문 합)

* <宮闕志>에는涵仁의 뜻을海東 가지가 임금의 仁義 흠뻑 젖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32) 涵仁亭 天障

내부 천장에는 陰陽五行 개념에 따라 四季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陶潛(陶淵明) <四時>

계절별 방향에 맞춰 걸었다. 陰陽五行은 우리 人間이 살아가는 영원한 두 世界인 남과 북,

동과 서, 하늘과 땅, 男과 女, 해와 달,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등은 바로 陰陽의 특성을

함축하는 자연적, 抽象的 개념들이다. (*: 질그릇 도 *: 잠길 잠)

 

*陰陽五行

 

구분

계절

()

여름()

환절기

가을()

겨울()

방위

中央

西

색깔

푸름(靑∙蒼)

빨강(赤∙朱)

노랑()

하양()

검정(黑∙玄)

 

 

 

 

 

 

(133)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 봄에 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134)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 여름 구름 기묘한 봉우리 많기도 해라.

 

(135) 秋月楊明輝 (추월양명휘) /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추고 (*: 빛날 휘)

 

(136)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 겨울 언덕 소나무의 외로움이 아름답구나.

 

(137) [涵仁亭 追記] 현판

*[涵仁亭追記] 내용

 敬寧殿(肅宗의 繼妃 仁顯王后의 魂殿), 孝寧殿(肅宗의 魂殿), 敬昭殿(景宗의 魂殿)과 같은

 昌慶宮 文政殿에 설치되었던 魂殿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魂殿들의 이름은 仁元王后(肅宗의 제2繼妃)의 魂殿이었던 孝昭殿까지 표시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揭板은 英祖 때 만든 것으로 보이며, <宮闕志>에도 가을 제삿날 밤에 지은

 英祖의 글이라고 敍述하고 있다.

 내용은英祖 자신의 나이가 어느덧 60이 넘어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先大王을 볼 面目이

 없다. 이는 첫째도 둘째도 자신의 不德이니, 불현듯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예전의 淸廟(魂殿)가 涵仁亭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제사를 지내기 전 두 時刻 전에 옷을

 정돈하고 涵仁亭에 앉아서 承宣을 불러 陪席하게 하고 때를 기다리며 이 詩를 짓는다.

       (*: 넋 혼 *: 걸 게 *: 사당 묘)

 

(138) ‘之字로 꼬인 소나무 줄기

 

(139) 明政殿과 崇文堂 뒷모습

 

(140)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

昌慶宮의 正殿으로 臣下들이 임금에게 新年賀禮를 드리거나 國家의 큰 행사를 치르며,

外國使臣을 맞이하던 장소로 조선시대 궁궐의 大殿은 南向으로 세웠으나, 明政殿은

예외적으로 東向이다.

明政殿은 成宗 15(1484) 처음 건립하였으나 壬辰倭亂 때 불에 타 光海君 8(1616)

다시 지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單層 건물로, 景福宮의 勤政殿과 昌德宮의 仁政殿이

2층의 거대한 규모인데 비해 궁궐의 正殿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明政殿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기는 하나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殿閣 중에서 가장 오래된 木造建物이며 朝鮮 前期 建築樣式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41) [明政殿] 편액

 

(142) 明政殿 龍床과 日月五嶽圖(日月崑崙圖) 병풍

明政殿 내부 바닥에는 塼[벽돌]을 깔고 뒤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龍床과 그 뒤에

日月五嶽圖 병풍이 있고 용상 위에는 닫집으로 짠 寶蓋를 만들었다. (*: 벽돌 전)

*日月五嶽圖. 日月崑崙圖, 日月圖, 日月五峰山圖라고도 한다

                                (*: 산 이름 곤 *: 산 이름 륜)

     원래 日月崑崙圖는 해와 달, 그리고 중국의 五岳 중 하나인 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崑崙山을 主題로 그린 그림으로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하게 발달하여

 精巧한 筆致와 화려한 채색을 사용, 莊重한 모습의 定型化된 그림으로 발전하였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昌德宮 仁政殿, 昌慶宮 明政殿, 景福宮 勤政殿, 德壽宮 中和殿의

 그림들이 대표적이다. (*: 산 이름 곤 *: 산 이름 륜)

 日月五嶽圖를 구성하는 素材들은 해와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와 波濤이다.

 각 소재들은 해와 달은 임금을 상징하며, 다섯 봉우리는 산신에게 祭를 올리던

 五嶽(金剛山, 白頭山, 智異山, 妙香山, 三角山)을 의미하며 동시에 임금의 長壽를

 기원하는 것이며, 소나무는 소나무가 무성하듯 王孫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그려진 것이며 파도는 朝廷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日月五嶽圖는 왕의 절대적인 권위의 稱頌과 王族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궁궐

 吉祥裝飾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 기릴 송 *: 상서)

 

(143) 明政殿 三分閤 꽃살문

 

(144) 明政殿 추녀

 

(145) 明政殿 추녀마루의 雜像

雜像은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줄지어 놓이는 瓦製 土偶이다. (*: 짝 우)

宮殿, 樓門, 神殿 등 전통적인 지붕에 장식하는 짐승모양의 기와로 맞배지붕은 내림마루

끝에, 우진각이나 팔작지붕에는 추녀마루 끝에 한 줄로 장식한다.

建物守護 상징과 장식을 겸하고 있으며 法僧, 奇人, 怪獸 등의 형상화하여 안쪽에

용머리를 두고 3, 5, 7 등의 홀수로 늘어놓는다.

 

(146) 明政殿 月臺의 드므

드므는 궁궐의 正殿과 같이 중요한 건물의 月臺 네 모서리에 防火水를 담아 놓는 그릇으로,

靑銅이나 돌로 만들며 모양은 圓形과 方形이 있고 솥 모양도 있다

木造建物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火魔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만든 것으로, 火魔는 너무

험상궂게 생겨 불 내러 왔다가 드므에 담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防火水의 容量이 작아 實用性보다 呪術的인 의미가 크다.

 

(147) 明政殿 月臺 계단과 소맷돌

月臺는 궁궐의 正殿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宮中 賀禮嘉禮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祭禮 때에 사용하기도 하고,

건물의 品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대개 方形 넓은 으로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으며, 月臺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月見臺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月臺는 공통적으로 건물의 前面 놓이며 長臺石 가지런히 쌓아 올려 壁面을 구성하고

月臺 바닥은 벽돌[]이나 薄石 깔며 모서리에 香爐∙드므를 올려놓기도 한다.

 

               

           (148) 明政殿 月臺 계단의 踏道 (*: 밟을 답)

     宮闕 正殿 階段의 임금이 사용하는 踏道(陛石이라고도 함)는 원래

     '神靈 앞에서 존경심을 표시하는 뜻'으로 설치한 것으로, 궁궐의 답도는

     王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뜻과 함께 왕이 다니는 통로를 祥瑞롭게

     조성하는 의미를 지닌다. 보통 四分心葉形 윤곽에 鳳凰 또는 용을 새기는데,

     昌慶宮 답도에는 鳳凰을 새겼다. (*: 대궐의 섬돌 폐)

   *景福宮 ∙昌德宮 ∙慶熙宮 踏道에는 鳳凰을, 德壽宮 답도에는 龍을 새겼다.

 

(149) 昌慶宮 明政殿朝廷, 品階石

*朝廷: 임금이 나라의 政治 議論, 執行하던 곳으로 王廷, 朝家, 朝堂이라고도 한다.

*品階石: 조선시대 文武百官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正一品에서 從九品까지 18등급으로

      품계를 나누었는데 그 品階 따라 돌에 품계를 새겼으며 그것을 궁궐의 正殿 앞 마당

      朝廷 품계의 순서에 따라 羅列하였다.

  나라의 朝會 賀禮, 國王誕辰 등 중요한 행사 시에 文武百官이 정렬할 때 자신의 벼슬

  품계석 앞에 정렬하였다.

  궁궐의 正殿 앞에 세운 品階石 좌우 12개씩 24개를 세웠는데 1품에서 3품까지는

  , 으로 구분하여 6개를 세워 武官 12개의 품계석을, 4품에서 9품까지는 ,

  구분하지 않고 6개씩 12개를 세웠다.

  正殿 바라보며 동쪽인 오른쪽에는 文官, 왼쪽인 서쪽에는 武官 정렬했는데

  東班 文官, 西班 武官 별칭으로 西班 통틀어兩班이라고 했다.

    *御道 臣道: 가운데 조금 높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이며, 양 옆 조금 낮은 길은

                       臣下들이 다니는 臣道이다.

 

(150) 昌慶宮 明政門  -보물 제385-

明政門은 앞면 3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多包式 건물로,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椽燈天障이나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새가 착실하고 알차, 조선 中期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의 中門建築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서까래 연)

   *椽燈天障: 별도로 천장을 만들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천장.

 

(151) 明政門 內行閣

 

(152) 玉川과 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玉川이라 했으며 明堂水 昌德宮의 尊德亭 지나

昌慶宮의 북쪽 春塘池 거쳐 玉川橋를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 못 당)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明堂水 일반적으로 禁川이라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 禁川橋

건너는 官人들이 淸廉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禁川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禁川橋라고도 불렀으며, 창경궁은 玉川橋,

경복궁은 永濟橋, 창덕궁은 錦川橋라고 이름 붙였다.

 

(153) 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

玉川橋 花崗石製 교량으로 成宗 15(1484) 창경궁이 완공될 때 架設 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半圓아치형의 虹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지고,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 무지개 홍 *: 무지개 예)

궁궐 안의 교량으로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昌慶宮 玉川橋는 다른

궁궐의 玉川橋(禁川橋)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154) 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

弘化門 창경궁의 正門으로 成宗 15(1484)建立하였으나 壬辰倭亂(1592) 때 불에 타,

光海君 8(1616)再建하였으며 그 후로 여러 차례 補修하였다.

앞면 3,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 건물로 東向 특징이며, 栱包 多包樣式으로 꾸몄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彫刻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彫刻像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 두공 공)

여러 차례의 수리와 丹靑으로 固有 아름다움은 잃었으나, 昌慶宮昌德宮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木造建築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55) 月覲門 (*: 뵐 근)

昌慶宮의 정문 弘化門 왼쪽(북쪽)에 있는 東門으로, 正祖 3(1779)에 건립했다.

正祖는 父親 思悼世子(莊祖)의 位牌를 모신 祠堂을 敬慕宮으로 格上하고, 이 문을 통해

참배하러 다녔다고 한다.

<承政院日記>에 正祖가이 문을 거쳐 한 달 혹은 한 달 걸러 한 번씩 展拜하러 다니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매달 초하루 景慕宮에 거둥할 때 통과하는 문이라 하여 月覲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6) [月覲門] 편액

 

서울 景慕宮 址

景慕宮址는 지금의 서울大學校病院 부근 일대에 있던 含春苑의 옛터로 成宗 15(1484)

昌慶宮을 건립하고, 風水地理說에 따라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출입을 통제했던 것이

始初였으며, 成宗 24(1493) <含春苑>이라 命名하고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壬辰倭亂德嬪(明宗 아들 順懷世子 )屍身 임시로 묻는 등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仁祖 때 含春苑의 半을 太僕司(임금의 車馬 調馬 등을 관장하던 官署)

나눠주어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 종 복)

英祖 40(1764) 思悼世子 祠堂 이곳으로 옮기고, 正祖 즉위하자 이곳을

<景慕宮>으로 불렀으며, 正祖 9(1785)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光武 3(1899) 경모궁에 있던 莊祖(思悼世子)位牌 宗廟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景慕宮도 景慕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光武 4(1900) 景慕宮 터에 六聖祖太祖世祖成宗肅宗英祖純祖 肖像 모시던

永禧殿 옮겨 세웠다. (*: 복 희)

日帝强占期에 경모궁 일대에 京城帝國大學을 세우면서 원래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6∙25전쟁으로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57) 서울 景慕宮 址   -사적 제237-

含春苑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시설 중 하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石壇과 三門인

含春門뿐이며, 원래 명칭은含春苑址였으나 2011년 文化財廳 告示로서울 景慕宮址

명칭이 변경되었다.

 

(158) 含春門

서울 景慕宮 터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정면 3, 측면 2칸이 맞배지붕 건물이며

섬세하게 彫刻 翼工 보아지(甫兒只)로 구성된 지붕이 아름답다. (*: 다만 지)

*甫兒只: 기둥과 보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보강해 주는 建築部材.

 

(159) 서울 景慕宮 基壇, 階段 소맷돌

 

(160) 서울 景慕宮 건물터

 

(161) 서울 景慕宮 址, 뒤에서 본 모습

 

                

             (162) 현충탑. 이름 모를 自由戰士 .

       鍾路區 蓮建洞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언덕 昌慶宮路 쪽에 있다.

       6∙25전쟁 발발 3일째 서울이 점령된 날인 1950.06.28,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있던 國軍 負傷兵 일반환자 및 가족 등, 北韓共産軍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된 900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顯忠塔이다.

      1963년 韓國日報社가 희생자들이 묻힌 장소 위에 탑을 세우고, 1999

      서울대학교병원이이름 모를 자유전사비유래 안내판을 세웠다.

 

 

                                      - 끝 -

출처 : 승화동기회
글쓴이 : 孤 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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