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보험 국제회계기준 2021년 도입
자산·부채 원가 아닌 시가로 평가
저축성 보험 팔면 준비금 쌓아야
생명보험사 최소 74조원 확충해야
빚 부담 줄이려 보장성 보험에 주력제도의 변화는 업계의 지형도를 바꾼다. 회사의 운명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전운이 감도는 곳은 보험업계다. 운명을 가를 제도는 2021년 도입될 보험의 새 국제회계기준(IFRS17)과 신(新)지급여력제도(K-ICS)다.
새 회계제도의 도입은 보험상품의 라인업도 바꾸고 있다. 보험사들은 저축성 보험 판매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대신 변액보험과 보장성 보험의 판매를 늘리고 있다. 종신보험 신상품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변액보험 자산 규모는 109조원으로 1년 동안 10.4%(10조원)나 늘었다. 전년도 증가율(3.7%)의 3배 수준이다. 같은 기간 생명보험 총자산(833조원)은 6.5%(51조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변액보험은 고객이 낸 보험료를 주식이나 채권 펀드에 투자해 발생한 수익을 보험금으로 되돌려주는 상품이다. 저축성 상품처럼 약정 이율을 주지 않은 만큼 새 회계제도에서도 보험사에 부담될 것이 없다. 적립금(책임준비금)을 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새 회계 제도에 대비하지 못하면 부실 회사로 전락할 수 있어서다. 최악의 경우 퇴출 위기까지 맞을 수 있다. 운명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보험사는 미래에 고객에게 지급할 보험금의 일부를 적립금으로 쌓아야 한다. 보험 부채다. 영국과 호주 등의 보험사는 보험 부채를 현재의 가격인 시가로 평가해 적립했지만 한국·일본·미국의 보험사는 이를 시가가 아닌 보험을 판매했던 시점의 원가로 평가해 재무제표를 작성했다. 보험권은 그동안 자산은 시가로, 부채는 원가로 평가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상품을 내놓거나 팔 때 원가로 계산하면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험사나 감독기관이 부채는 원가로 평가하고, 채권 등 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산은 시가를 반영했다”고 말했다.
IFRS17의 핵심은 원가로 평가하던 보험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보험사가 10년 뒤 책임준비금 3억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자. 보험을 판매하던 시점의 금리는 연 7.5%였다.
이 부채를 원가로 평가하는 현 회계 제도상으로는 만기를 10년 앞둔 가입 시점에는 1억4556만원 정도의 적립금만 쌓아두면 된다. 가입 당시 금리(연 7.5%)에 해당하는 수익이 매년 날 것이라는 가정하에 10년 뒤 3억원이 된다는 계산에서다.
그런데 IFRS17이 도입돼 이 보험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최근 시장금리 상승세를 고려해 연 2.5%의 금리를 적용하자. 만기를 10년 앞둔 시점에도 보험사가 쟁여둬야 할 적립금은 2억3436만원이 된다. 원가 평가 때 필요한 적립금보다 쌓아둬야 할 돈이 8880만원이나 늘어난다.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험사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동안은 부채를 원가로 따지다 보니 보험사의 적정 자본 상태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시가를 적용하게 되면 원가에 가려져 있던 보험사의 민낯이 드러나게 된다. 게다가 전 세계 보험사에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 모든 회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보험사에 미칠 충격이 크다는 데 있다. 국내 보험사, 특히 생명보험사는 과거 확정형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았다. 그 여파가 지금 미치는 셈이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생보사가 보유한 부채 중 약정 이율이 연 5%가 넘는 고금리 상품의 비중은 29.9%에 이른다. 연 7%가 넘는 부채도 18.1%나 된다.
나이스신용평가가 최근 보험부채 적정성 평가제도(LAT)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말 국고채 금리(5년물과 10년물 평균 연 2.4%)를 적용해 시가로 평가한 국내 생보사의 보험부채는 약 531조원으로 추산됐다. 생보사들이 추가로 쌓아야 하는 총부채 규모는 74조원에 달했다.
늘어나는 부채에 보험사의 한숨을 더하는 것은 강화되는 건전성 평가 기준이다. IFRS17도입에 발맞춰 바뀌는 K-ICS다. 지급여력제도는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요청을 한꺼번에 받았을 때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을 수치화한 지표다.
그동안 보험사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급여력비율(RBC)을 계산할 때 자산은 시가와 원가(대출 채권과 만기보유채권)로, 부채는 원가로 평가해 산출했다. 자산은 많게 부채는 적게 적용된 이유다. 이 결과 보험사 건전성의 착시 효과가 발생해 위험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IFRS17처럼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K-ICS가 적용되면 지급여력비율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보험회사의 RBC는 257.8%였다. 부실 위험인 100%를 훨씬 웃돈다. 하지만 K-ICS가 도입되면 이 수치는 큰 폭으로 내릴 수 있다. 문제가 있는 보험사로 낙인 찍힐 수 있다. 고객이 이탈해 보험사 문을 닫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보험사는 자본 확충 등 대응책 마련을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 한화생명은 지난해와 올해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5000억원과 10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교보생명도 지난해 해외에서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에 성공했다.
신종자본증권은 주식처럼 만기가 없거나 길고, 채권처럼 매년 일정한 이자나 배당을 주는 금융상품으로 후순위채보다 금리가 높지만 IFRS17 기준에서는 자본으로 100% 인정된다.
이강욱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시장 금리가 완만히 상승하는 상황에서 보험사들이 자체적으로 자본을 확충하면 새로운 제도 시행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험사의 건전성을 강조하는 IFRS17과 K-ICS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해식 보험연구원 금융정책실장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보험사가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겠지만 회계가 강화되고 수익 창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보험 상품의 보장 범위와 기간을 줄여 소비자 효용이 낮아질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회계 기준이 강화된 뒤 유럽 지역에서 보험사들이 변액보험 상품에만 주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인 만큼 금융 당국이 이런 부작용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자산·부채 원가 아닌 시가로 평가
저축성 보험 팔면 준비금 쌓아야
생명보험사 최소 74조원 확충해야
빚 부담 줄이려 보장성 보험에 주력제도의 변화는 업계의 지형도를 바꾼다. 회사의 운명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전운이 감도는 곳은 보험업계다. 운명을 가를 제도는 2021년 도입될 보험의 새 국제회계기준(IFRS17)과 신(新)지급여력제도(K-ICS)다.
새 회계제도의 도입은 보험상품의 라인업도 바꾸고 있다. 보험사들은 저축성 보험 판매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대신 변액보험과 보장성 보험의 판매를 늘리고 있다. 종신보험 신상품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변액보험 자산 규모는 109조원으로 1년 동안 10.4%(10조원)나 늘었다. 전년도 증가율(3.7%)의 3배 수준이다. 같은 기간 생명보험 총자산(833조원)은 6.5%(51조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변액보험은 고객이 낸 보험료를 주식이나 채권 펀드에 투자해 발생한 수익을 보험금으로 되돌려주는 상품이다. 저축성 상품처럼 약정 이율을 주지 않은 만큼 새 회계제도에서도 보험사에 부담될 것이 없다. 적립금(책임준비금)을 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이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새 회계 제도에 대비하지 못하면 부실 회사로 전락할 수 있어서다. 최악의 경우 퇴출 위기까지 맞을 수 있다. 운명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보험업계 관계자는 “상품을 내놓거나 팔 때 원가로 계산하면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험사나 감독기관이 부채는 원가로 평가하고, 채권 등 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산은 시가를 반영했다”고 말했다.
IFRS17의 핵심은 원가로 평가하던 보험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보험사가 10년 뒤 책임준비금 3억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자. 보험을 판매하던 시점의 금리는 연 7.5%였다.
이 부채를 원가로 평가하는 현 회계 제도상으로는 만기를 10년 앞둔 가입 시점에는 1억4556만원 정도의 적립금만 쌓아두면 된다. 가입 당시 금리(연 7.5%)에 해당하는 수익이 매년 날 것이라는 가정하에 10년 뒤 3억원이 된다는 계산에서다.
그런데 IFRS17이 도입돼 이 보험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최근 시장금리 상승세를 고려해 연 2.5%의 금리를 적용하자. 만기를 10년 앞둔 시점에도 보험사가 쟁여둬야 할 적립금은 2억3436만원이 된다. 원가 평가 때 필요한 적립금보다 쌓아둬야 할 돈이 8880만원이나 늘어난다.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험사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동안은 부채를 원가로 따지다 보니 보험사의 적정 자본 상태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시가를 적용하게 되면 원가에 가려져 있던 보험사의 민낯이 드러나게 된다. 게다가 전 세계 보험사에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 모든 회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보험사에 미칠 충격이 크다는 데 있다. 국내 보험사, 특히 생명보험사는 과거 확정형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았다. 그 여파가 지금 미치는 셈이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생보사가 보유한 부채 중 약정 이율이 연 5%가 넘는 고금리 상품의 비중은 29.9%에 이른다. 연 7%가 넘는 부채도 18.1%나 된다.
나이스신용평가가 최근 보험부채 적정성 평가제도(LAT)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말 국고채 금리(5년물과 10년물 평균 연 2.4%)를 적용해 시가로 평가한 국내 생보사의 보험부채는 약 531조원으로 추산됐다. 생보사들이 추가로 쌓아야 하는 총부채 규모는 74조원에 달했다.
자료: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
자료:생명보험협회
그동안 보험사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급여력비율(RBC)을 계산할 때 자산은 시가와 원가(대출 채권과 만기보유채권)로, 부채는 원가로 평가해 산출했다. 자산은 많게 부채는 적게 적용된 이유다. 이 결과 보험사 건전성의 착시 효과가 발생해 위험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IFRS17처럼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K-ICS가 적용되면 지급여력비율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보험회사의 RBC는 257.8%였다. 부실 위험인 100%를 훨씬 웃돈다. 하지만 K-ICS가 도입되면 이 수치는 큰 폭으로 내릴 수 있다. 문제가 있는 보험사로 낙인 찍힐 수 있다. 고객이 이탈해 보험사 문을 닫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보험사는 자본 확충 등 대응책 마련을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 한화생명은 지난해와 올해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5000억원과 10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교보생명도 지난해 해외에서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에 성공했다.
신종자본증권은 주식처럼 만기가 없거나 길고, 채권처럼 매년 일정한 이자나 배당을 주는 금융상품으로 후순위채보다 금리가 높지만 IFRS17 기준에서는 자본으로 100% 인정된다.
이강욱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시장 금리가 완만히 상승하는 상황에서 보험사들이 자체적으로 자본을 확충하면 새로운 제도 시행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험사의 건전성을 강조하는 IFRS17과 K-ICS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해식 보험연구원 금융정책실장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보험사가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겠지만 회계가 강화되고 수익 창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보험 상품의 보장 범위와 기간을 줄여 소비자 효용이 낮아질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회계 기준이 강화된 뒤 유럽 지역에서 보험사들이 변액보험 상품에만 주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인 만큼 금융 당국이 이런 부작용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