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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형 칼럼] 이재용 석방, 법은 누구편인가

含閒 2018. 2. 7. 18:52

[김세형 칼럼] 이재용 석방, 법은 누구편인가


  • 김세형
  • 입력 : 2018.02.07 10:44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일 오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지난해 2월 17일 특검팀에 구속된 지 353일 만에 풀려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김세형 칼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2심판결은 역사적인 명판결일까, 재벌 봐주기에 불과한 판결일까. 

영국의 BBC는 가장 일어나기 어려운 경우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극적인 반전'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판결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뉴욕 맨해튼이 한때 밤이면 맘놓고 돌아다닐 수 없는 무법천지의 폭력이 들끓었는데 웨이드 판사의 명판결이 이 난장판을 해결했다. 여성이 강간당해서 태어난 아이는 출생 순간부터 천시받아 결국 범죄인으로 자라는데 그런 경우 낙태를 해도 좋다는 판결(로대웨이드 사건)로 맨해튼은 평화를 되찾았다.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Ronald Myles Dworkin)은 "법관이란 과거로부터 작가를 달리하여 계속 쓰이고 있는 연작소설을 써내려가는 공동창작자"라고 그의 책 '법의제국'에서 설파했다. 

한국의 법관들도 여성이 호주(戶主)가 될 수 있게 하고 친고죄를 폐지해 성범죄 수사의 족쇄를 풀어내는 연작소설을 써왔다. 이재용 2심판결 전망에 대해 "시대정신이 유무죄의 법리보다 우위에 선다"는 예측까지 나돌았다. 문재인정부를 탄생케 하는 촛불세력의 압력을 감히 거스르기 어려울 것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정형식 부장판사의 판결은 그런 관측을 거스른 서프라이즈였다. 어떤 로펌 대표는 "정 판사의 판결은 사법부의 정의를 지켜냈다. 그가 존경스럽다"고 상찬했다. 반대의 생각으로 성난 사람들은 청와대게시판에 "이러려고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었나. 정 판사를 파면해달라"고 반대 의견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삼성 경영권 승계구도에 관한 청와대 캐비닛 자료까지 제공했던 청와대는 침묵하지만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분노가 치민다"고 화를 쏟아냈다. SNS에선 정형식 신상털기, 가족관계까지 난도질하는데 그는 훤히 그런 사태가 오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정형식 부장판사가 한국 법조사에서 작가를 달리하는 연작소설가일지는 시간이 흘러 내년 초쯤 대법원이 최종 판결로 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분명한 것은 BBC의 말대로 가장 일어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 판결은 제왕적 대통령 권력과 한국 최대 재벌 총수(사실상) 간 일과 금전이 얽힐 경우 행동원칙에 새로운 규준을 세울 것이다. 그 이전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좀 무식하게 기업인에게 돈을 챙겨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번 케이스는 대통령이 자신이 직접 돈을 챙기지 않고 후견인(최순실)을 도우려 금전 지원(딸의 승마)을 요구했고, 삼성 오너는 승계구도에 지원을 받자고 했다는 것이다. 좀 더 복잡한 뇌물 관계다. 1심은 포괄적 승계구도에 묵시적 청탁을 했다는 법논리로 판결했다. 재벌과 짜고 국정농단을 벌인 대통령은 마땅히 탄핵이 돼 새 정부가 탄생했다는 기승전결에 안도감을 주는 판결구도였다. 

그런데 2심은 포괄적 승계-묵시적 청탁이라는 카드로 지은 집을 부숴버렸다. 청와대는 승계구도(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를 몰랐고 이재용은 그런 도움을 받은 게 아니며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독일에서 승마용 말을 사용하는데 36억원을 제공한 부분만 뇌물로 인정해 이재용의 석방 논리를 구성했다. 그것도 대통령(권력)이 무서워 돈을 준 것, 즉 최고권력자인 박근혜가 삼성을 겁박해 뇌물을 챙긴 사건으로 판단했다. 

정형식 판사의 판결을 두고 한쪽에서는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를 살렸다 하고, 반대하는 쪽은 재벌의 이익을 두둔했다고 비난한다. 결국 법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묻는 것이다. 세계 어느 대법원엘 가든 한쪽엔 저울을, 다른 한쪽엔 칼을 들고 두 눈은 가린 정의의 여신, 즉 유스티치아(justice의 어원)가 있다. 디케라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을 펼친다. 트라시마코스는 법과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강변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럼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으면 무엇이냐고 따지자 소크라테스는 치자(治者)는 국민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말한다. 즉 약자를 먼저 돌본다는 것이다. 

이재용 2심판결에 대해 청원게시판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판사가 삼성이란 강자의 편을 들었다고 화가 났다. 명판결이라고 편드는 쪽에서는 그런 주장과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의 법은 누구 편인가. 이런 물음은 참으로 어리석은지 모른다. 

유스티치아의 여신이 두 눈을 가리지 않고 저울도 내동댕이치고 강자만을 쳐다보고 있다는 얘긴가? 그럼 여기서 더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누가 강자인가. 판사가 보기에 어느 쪽에 불리하게 판결했을 경우 자신에게 해가 돌아올지 모르는 힘이 강하게 돌아오는 쪽이 아닐까. 대법원장도 코드형으로 바뀌었고, 성난 여론의 한가운데 그게 어느 쪽이겠는가. 그래서 요즘 판사는 정치판사가 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 옛날 전두환·노태우가 재벌에 돈 받았을 때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판사가 정의의 최후의 보루가 되려면 여전히 두 눈을 가린 유스티치아여아 한다. 오로지 증거와 법리로만 말해야만 흔들리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판결은, 즉 법은 정의의 편일 뿐이다. 그래서 현대의 정의는 소크라테스 시대에 비해 강철처럼 딱딱해지고 화석처럼 굳어가는지 모르겠다. 

정형식 판사의 판결문 가운데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하나의 구절이 있었다.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해도 공무원 부패에 조력해선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이재용은 검찰에 불려가 구속되기 전날 회사 임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내일 똑같이 대통령이 돈을 달라고 요구하면 안 줄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밝혀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 판사는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이번 판결로 대통령과 재벌총수 두 사람이 독대하는 일을 치워낼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만 있더라도 해서 될 말, 안 될 말의 획을 그어준 계기도 될 것이다. 

[김세형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