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회재 이언적의 무위(삼도헌의 한시산책 410)

含閒 2017. 3. 23. 13:06

회재 이언적의 무위(삼도헌의 한시산책 410)



아계 이산해 작 <독락당>




독랑당 내 정자 계정


無爲

李彦迪

 

萬物變遷無定態


一身閑寂自隨時


年來漸省經營力


長對靑山不賦詩

 

만물은 변천하여 일정한 자태없고

      이 한 몸 한가로와 절로 때를 따르노라.

연래로 경영하는 힘을 점차 줄인지라

      푸른 산 오래 보면서 시도 짓지 못하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이 시는 도학자(道學者)인 이언적 선생의 학자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 시이다선생이 사간(司諫직책에 있을 때 당시의 권신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해 고향으로 내려와 경주 자옥산 아래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이 시는 이 시기에 지은 시로 도가의 무위 사상을 말한 것이 아니고유가(儒家)의 사리(事理)를 거슬러 억지로 이루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참고로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가 휘호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이 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선생 역시 자신의 몸도 변화 속에 있는 것이므로 한적하게 지내며 때의 변천을 따르겠다고 말한다근래 들어 점점 경영하는 힘즉 출세나 명예를 탐하는 것문장을 꾸미는 것 등등을 의미하는 작위(作爲)의 힘이 줄어드니 오래 청산을 마주하고도 속인처럼 시를 짓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수광은 이 시를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말의 뜻이 심히 높아[語意甚高], 구구하게 시를 짓는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非苟苟作詩者所能及也]”라고 평했다.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 22~1553, 명종 8)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 자는 부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이후 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내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명종 즉위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명종이 즉위하자 서계십조(書啓十條)를 올렸다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삼도헌의 한시산책 410

2017. 3.22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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