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고죽(孤竹) 최경창 홍랑(洪娘)의 감동적인 사랑

含閒 2016. 6. 8. 13:16



고죽(孤竹) 최경창 홍랑(洪娘)의 감동적인 사랑

 

조선시대의 명기(名妓)'하면 울님들은 퍼뜩 황진이(黃眞伊)가

떠오를 것이외다 그러나 유수는 정말 '조선시대의 최고의 기생'으로

감히 홍랑(洪娘)을 꼽겠나이다
두 기생의 공통점은 예기(藝妓: 노래 춤 그림 글씨 시문 따위의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이자 재색을 고루 갖춘 여류 시인이다
 이들 두 여인의 차이점은 황진이는 명문대가 황진사댁 첩의 딸로

동네 머슴이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상사병으로 죽어 그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가다 멈춰 어느 점쟁이의 부탁(?)으로

황진이의 속곳을 상여에 덮어 주어 그 상여가 움직이게 하였다는

내용을 유수가 전번에 '송도삼절'에서 소개하였지요?
그 후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해 사대부라 합시고 폼만 재고

밥값 제대로 못하는 그들을 쌍코피 내 준 어찌보면 자기가 첩의 딸로 태어나

좋은 데 시집을 못간 그 한을 이들 사대부에게 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랑은 황진이와 전혀 출신이 다르다
홍랑은 비록 관기였지만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명성이 높았던

풍류 문장가 고죽 최경창에게만 일생동안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여인이었다
허허~충신불사이군이요, 열녀불경이부라(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육신 성삼문을 '충신불사이군'이라면
홍랑은 '열녀불경이부'로 비유될 수 있다
'열녀'는 물론 조강지처 적실인 여인에게만 해당되긴 하지만
나는 소싯적 은사로부터 '홍랑과 최경창의 애틋하고 감동적이며
고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 때의 기억과

이들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이 글을 쓴다
최경창의 후손들에 의하면 홍랑은 함경도 홍원 기생으로 '애절

愛節 사랑의 절개 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한다
그녀의 이름 '애절'처럼 홍낭은 비록 관기(官妓)의 몸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

(路柳牆花 아무나 쉽게 꺾을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창녀나 기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홍랑은 고죽 최경창(1539~1583)이 문과에 급제 후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 후 그를 알게 되어

사랑이 싹터 그녀는 일생을 자기의 모든 것을 고죽에게 바친 정말

'순애보'의 주인공이라고 유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고죽과 홍랑의 로맨스(?)를 울님들에게 소개한다
왜 유수가 이토록 홍랑을 사모하고 흠모하고 존경하는지를

울님들은 자세히 모를 겁니다
홍랑이 최경창을 만나 세세생생(世世生生 불교 몇 번이든지 다시
환생하는 일

또는 그런 때 중생이 나서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형태)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에 대해 노가리를 풀겠소이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부터 국방의 요지이었기에 최경창은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홍랑을 만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과 겨성
최고의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경창은 관리였기에 관기 홍랑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고
홀로 생활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당시 홍랑은 관아에 속해있던
관기였기에 다른 지역으로 함부러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밥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 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첫사랑 최경창에게 홍랑은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이별이 너무나도 서럽고
아쉬어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한양으로 부임하는 최경창을
멀리 멀리까지 배웅해 주었다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홍랑은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슬픈 시조 한 수를 이렇게 읊었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묏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 돋아나면 날(홍랑)인가도 여기소서)
훗날 최경창이 홍랑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위의 시를 한시로 이렇게 번역을 했다 한다
택절양류기천리 인위시향정전종 수지일야생신엽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이별의 아픔이란

이 세상 어느 누구다 다 마찬가지 홍랑과의 헤어져야 하는
최경창의 맘은 더욱 아팠을 것이다. 왜? 남자가 더 약하니까
홍랑을 두고 고죽은 한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한양으로 돌아온 최경창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아마 홍랑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렸지 싶다
'상사병에는 약이 소용 없다'는 말처럼.. 그는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한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접한 홍랑은 경성에서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하여 최경창을 만난다 두 사람의
이런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마침
그때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 중이었는데..국상 중에 기생을 불러들였다는
구실로홍랑은 양계의 금(兩界의 禁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홍랑 또한 홍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그의 곁을 떠나는 홍랑에게 유란(幽蘭)을 선물하며 아래와 같은
시로서 그녀를 위로하였다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

지금도 궂은 비 내려 첩첩 산길 어룹겠지
이렇게 최경창과 홍랑은 두번 째 만남과 이별 후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으로 한직을 떠돌다 1583년 45세의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님가 다시 만날 날만 학수고대하던 홍랑에게 날아든
고죽의 사망 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 주었다
사자불가환생이라.. 다시는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는 비애감으로

그녀는 목을 놓아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홍랑은 마음을 추스려야만 했다. 객사한 고죽의 묘를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서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뭇 남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을 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자신을 만들었고

그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커다란 숯덩이를 통째로 삼켜
벙어리가 되어 스스로 병신이 되었다 한다

*** *** *** *** *** *** *** *** ***
남자인 나도 눈물이 나올라카네요

이토록 가신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지아비에게
죽을 때까지 사랑을 베푼다는 사실에.... 인간 홍랑이 존경스럽군요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그 덕분에
홍랑은 무사히 삼년 상을 마칠 수 있었다. 삼년 상 후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최경창이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최경창의 작품은 훼손되지 않은 것은

모두 홍랑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숨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후 '고죽집(孤竹集)'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 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을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는 묻혀 있다
현재 산소에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해주 최씨의 집안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홍랑을 자신들의 할머니라고 서스럼 없이 말할 정도로
이 집안에서 홍랑을 생각하는 맘이 각별하다고 한다
홍랑~

그녀의 이름 '애절(愛節)'처럼 홍랑은 그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최경창을 지금도 저 세상에서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있을 것이다

참 대단한 홍낭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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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강남멋장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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