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속의 선정릉과 봉은사를 찾아
서울 도심의 한복판인 선릉역에 하루에도 수만명의 사람들이 오고가건만 선정릉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이곳을 수 없이 지나 다녔지만 이곳을 관람한 것은 처음이다.
서울은 참으로 축복받은 도시이다. 1천만명이 사는 도시에 500년의 역사가 묻어 있는 다섯개의 궁궐, 왕릉, 두개의 고찰, 북한산, 도봉산 등 빼어난 산, 아름다운 한강, 드넓은 남산공원 등이 아우러진 도시가 세계 어디에 있을가.
흔히 선릉으로 알려진 선정릉은 조선조 제9대 왕인 성종과 그의 계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그리고 정현왕후의 아들이자 제10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제11대 왕인 중종의 릉이 있는 곳이다.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경국대전>을 반포하였고 전세(田稅)와 유학의 장려 등을 통해 조선 봉건국가 체제를 굳건히 했다. 성종은 3비(妃)와 9후궁 등 12명의 부인 사이에 16남 12녀를 생산하는 조선 왕들 중 최고의 정력을 과시하였다.
중종은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39년간 재위했는데 집권 초반에는 조광조 등 신진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대신을 억제하고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려고 현량과를 설치하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향촌자치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서원(書院)이 설립되기 시작했고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다. 그러나 젊은 사림파의 계속된 개혁주장에 점점 싫증을 느꼈고 그들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버릇이 있어 신진 사림파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중종의 불쾌한 마음을 헤아린 심정과 남곤 등 훈구대신들은 음모를 꾸며 죄없는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중종의 묘는 당초 고양시 희릉에 있었으나 그의 비(妃)인 유명한 문정왕후가 사후 합장을 하려고 이곳으로 옮겼으나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여 이곳 선릉 홍살문까지 물에 잠기자 문정왕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장사하였다.
조선 왕릉의 입지조건은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어야 하며 반드시 앞에 물이 흐르는 등 풍수지리상의 길지로서의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당시는 이곳이 성밖으로 당연히 한성이 아니였다.
아마도 그 당시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풍광이 빼어났을 것이다. 지금도 수려한 소나무가 많고 숲이 넓어 강남의 허파 노릇을 해 준다. 즉, 자동차 배기가스에 오염될 대로 오염된 공기를 정화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협소한 도산농원은 알아도 이 드넓은 선정릉은 잘 모른다. 강남을 개발할 때 재원조달 상 마구잡이로 땅을 팔아치운 서울시도 여기는 왕릉이므로 손을 못댄던 것이다. 동구릉, 서삼릉, 광릉 등은 광화문에서 2~3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왕릉은 여기가 유일하다.
선정릉을 돌아보고 뒷문을 통하여 도보로 봉은사로 향했다. 봉은사는 신라 794년에 고승 연회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당초는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선정릉 자리에 있었는데 문정왕후가 사후 중종과 합장하려고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봉은사라는 이름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남편의 묘인 선릉을 위해 이 절을 중창하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중종이 붕어하고 명종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 윤씨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과거에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승려들의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과에 합격하여 차례로 봉은사의 주지를 지냈다. 문정왕후는 도에 지나친 불교신자로 말썽 많았던 승려 보우선사(普雨禪師)를 총애하여 봉은사의 주지를 거쳐 심지어 병조판서를 제수하기도 하였다.
조계종 촘무원의 직영사찰은 전국에 4곳인데, 조계사, 대구 팔공산의 선본사, 강화도 석문도의 보문사, 봉은사이다. 직영사찰은 조계종 총무원장이 그 사찰의 당연직 주지가 되고 총무원장이 임명하는 대리인(스님)이 그 사찰의 재산을 관리한다.
봉은사는 2010년에 직영사찰로 지정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조계종 총무원과 당시 개성 강한 봉은사 주지간에 갈등이 있어 직영사찰의 속내가 들어나기도 했다. 그 스님은 음모설을 제기하는 책까지 출간하여 세간의 물의를 빚기도 했다.
淸閑 執筆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