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在生活裏)

아버지의 편지

含閒 2007. 2. 8. 18:24
                                                   
                                            큰애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네 손을 잡고
결혼식장 들어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손자가 생겼다니
정말 세월은 화살보다 빠르구나.

엄마 없는 결혼식이라
신부인 네가 더 걱정스럽고 애가 타서 잠 못 이뤘을 것이다.
네 손에 들려 있던 화사한 부케가
너의 마음처럼 바르르 떨리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하다.

결혼식 끝나고도 이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그곳에 남아 서성거렸단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붉어진 네 눈자위가 그만 애비의 울음보를 터뜨렸지.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다 당숙의 손에 이끌려
겨우겨우 나왔단다.

큰애야.
편지 한 장 쓰지 않고 지내다가 손자가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받고 이렇게 펜을 들었다.

마음이야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시어른이 계시니 전화하기도 불편하고
애비 마음 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친정 엄마가 있었으면 내 속이 이리 어렵진 않았을 텐데
못난 애비가 한없이 한심스럽다.

읍내 장에 나가 참깨를 팔아서 금은방에 들렀다.
손주 녀석 은수저 한 벌을 고르고 그릇도 한 벌 사왔다.
건강하게 잘 크라는 외할아버지 마음까지
한바구니 담아 백일쯤에 전해주려 하는구나.
이 다음 손주 녀석이 크면 외할아버지 사랑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겠지

아이가 건강하다니 무엇보다 큰 다행이구나.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모양인데
이 세상에서 부모 되는 일은 그리 수월하지 않다고 들었다.
행여라도 네 엄마가 생각나서 그런 거라면
애비 편지 받고 곧 잊어라.
귀여운 여린 것 봐서라도
네가 건강한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 알고 있겠지?

슬프고 안타까운 네 속을 애비는 안다.
너그럽게 마음 가다듬고 좋은 생각만 하거라.
앞으로 어렵고 힘든 일 생기더라도
슬기롭게 극복해 가리라 믿고 있겠다.

시어른들 잘 받들고
남편 잘 섬기고
아이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날마다 기도한단다.
애비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노인정에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쉬엄쉬엄 농사일도 하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몸 추슬러 잘 살아라.

큰애야.
나는 너를 믿는다. 곱게 살거라.


- 아버지가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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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딸 이선씨가 난생 처음 친정 아버지 한테
받아서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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