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53>
월성에서 발견한 고구려 비편, 광개토대왕비 예서체와 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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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 2026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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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
5세기 신라-고구려 관계 열쇠
2026년 2월 3일 국내 한 언론은 1937년 최남주에 의해 경주 서월성 지구에서 발견된 비석 편과 2020년 12월 11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장기명 학예사가 월성해자(月城垓字)출입로 배수로에서 발견한 비석 조각의 관계성에 대해 독자에게 전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국립 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전경효 연구원의 금석학적인 문제 제기로 인해 2024년 6월 이 방면의 전문학자들이 모여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서기 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예서체와 빼닮은 것으로 판명하였다. 특히 이 비문 내용을 판독한 결과 광개토대왕비문 내용에 나오는 貢(공). 白(백). 渡(도). 不(불). 天(천)등 동일한 예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김동하 전문위원의 조언으로 1937년 최남주가 서월성 지구에서 발견한 비편과 2020년 월성해자에서 발견한 비편을 붙여서 3D 스캔을 해본 결과 글씨체 아귀가 딱들어 맞는 원래 한 몸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라왕궁터에서 광개토대왕 비문과 닮은 고구려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 신라 신민(臣民)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월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조각이 5세기 신라, 고구려 사이의 국제정치 외교사적인 의문을 풀 수 있는 황금열쇠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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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월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한문 예서체와 동일한 비석조각. 오른쪽은 1937년 최남주에 의해 서월성지구에서 발견된 비석조각. 왼쪽은 2020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장기명 학예사에 의해 월성해자 출입로 동쪽 배수로 아래서 발견된 비석조각. 두조각을 맞춰보니 글씨체가 동일했다. (사진제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
1937년 월성비편 발견경위
일제의 서슬퍼런 칼날이 민족혼을 난도질하던 1937년 6월27일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1905~1980)는 서쪽 월성지구에서 최초로 고구려광개토대왕비 서체(書體)를 닮은 비석 조각을 발견하였다. 손바닥 크기의 비석 조각엔 웅혼한 고구려 예서체로 6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최남주는 후일 월성비 조각발견 경위를 구술로 회고하였다. 1937년 6월 27일 오전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무렵 월성 서쪽지구(교촌마을 인접) 진입로 초입에서 사자 문양의 와당 조각과 신라 토제 벼루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확인차 현장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최남주는 토제 벼루 조각 등이 출토되는 것을 보았을 때 이곳을 신라 관청지구로 추정하였다.
인근 돌무지 속에 신라 토제 벼루조각과 연화문 와당조각 그리고 손바닥만한 돌조각에서 고구려 예서체가 새겨진 금석문 조각을 발견하였다. 최남주는 보성고보 재학 시절 은사인 민족사학자 황의돈 박사로부터 금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이러한 학문적 바탕으로 1934년, 1935년 남산신성비와 임신서기석, 1936년 무열왕릉비편, 1937년 흥덕왕릉비편, 성덕왕릉비편, 황복사비편, 숭복사비편등 수많은 신라 금석문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서월성 지구에서 발견한 비석 조각은 기존 자신이 발견한 신라금석문과는 서체와 양식이 전혀 달랐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서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입증할만한 호우총 유물과 고구려 중원비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게도 고증은 더 나아가질 못했다.
최남주는 비석 조각을 경주박물관에 가져와 후학이 언젠가 그 의미를 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보존하고자 했고. 그렇게 고구려 비석 조각은 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긴 잠을 자게 되었던 것이다. 1969년 최남주는 신동아 3월호 ‘신라의 얼을 찾아 반세기’ 기고문을 통해서도 월성 비편 발견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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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최남주가 서월성지구에서 발견한 비석의 뒷면에 친필로 기록한 발견 경위.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사진제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고구려 비석 조각의 가치
최남주는 평생을 바쳐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 벌판을 누비며 수많은 신라 금석문을 발견하여 신라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밝혔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 발견 노력이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신라 금석문들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6년 1월 장기명은 ‘영남고고학 제104호’에 논문을 통해 월성출토 고구려 비편을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과 연관 지어 서기 400년 월성에 세워진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기념비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는지를 둘러싸고 다시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속에서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헌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다.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신라, 백제, 가야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이를 격파하고 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비문 속에 일본의 한반도 남부 식민설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비문 문맥에 드러난 한때 신라의 고구려 종속 가능성은 여전히 주목해볼 만하다. 그동안 최남주가 발견한 월성 고구려 비편은 학계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나, 2020년 월성에서 발견된 비편과 함께 다시 조명을 받고있다.
국가문화유산청 문화유산위원장 강봉원은 2026년 2월 11일 월성출토비편 포럼에 참석하여 “석당 최남주선생님께서 오래전에 발견하신 비편이 박물관(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이제서야 빛을 보고있습니다”라고 유족에게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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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하는 최남주. 그는 답사현장에서 사학과 학생들에게 신라금석문의 중요성을 강의했다.(사진제공 석당 최남주 앨범) |
민족문화를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의 탄압속에서 최남주가 월성에서 발견한 비석 조각은 한 세기 동안의 긴 어둠에서 깨어나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증거와 의미 깊은 가치로 재조명되고 있다.
여전히 학계에서 이 고구려 비석조각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지만 그동안 신라왕경 내에서 출토된 5세기 서봉총과 호우총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과 충주 고구려비 등과 함께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정토에서 최남주는 월성 고구려 비편을 한 세기 만에 역사 속으로 초혼시켜 준 후학 장기명, 전경효, 김동하, 노형석 등에게 환희로서 무척 고마움을 표하리라.
편집부 기자 / 2026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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