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보물(소정수필)
2004년 8월 6일 인천공항에서 우리 일행을 태운 케세이 퍼시픽 비행기는 홍콩, 싱가폴을 경유하여 거의 12시간 만에 우리를 인도양 위에 떠있는 작은 <찬란하게 빛나는 섬>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마침 8월은 남서 몬순기로 적도부근에서 발생한 습한 공기를 포함한 계절풍이 남서 해안지대에서 고원지대로 불어오고 있어 콜롬보는 우리를 따스하면서도 시원하게 맞아주었다. 우리나라의 약 3분의 1 크기로 인도 대륙의 동남쪽에 있는 <인도의 눈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은 섬이다. 인도의 사성 제도를 타파한 완전 불교 국가로 세계의 문화유산인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시기리아 바위요새, 담불라 바위사원, 캔디 등 관광할 만한 유산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 와서 찾은 진짜 보물은 세계적인 문화유산도 아니고,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시바여왕’의 환심을 사기위해 선물했다는 스리랑카의 루비나, 스리랑카에 많다는 다른 보석들도 아니었다. 우리 나이 많은 세대에게 좀 더 친밀한 스리랑카의 옛 이름 ‘실론’ 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론 홍차’도 내가 본 진짜 보물은 아니었다.
지난 1년간은 너무 바빠 휴식다운 휴식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지 휴식을 위해 스리랑카로 온 것이다. 1978년에 건축한 세영정외과의원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다시 설치하고, 배관도 모두 바꾸었다. 아들 한수가 돌아와 함께 진료할 수 있도록 스포츠 클리닉, 비만 클리닉 등을 신설하는 등 전면적인 개조를 단행했다. 환자를 보면서 이러한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치료 요원의 교육, 치료기구 준비 등도 만만치 않았다. 장녀 보미와 물리치료사 등을 비만전문 병원에 보내어 실습을 시키고, 학술 집담회 등에도 보내고, 비만 코디 교육도 이수하도록 여러 가지 신경을 썼다. 병원 내에 팀을 구성하여 수개월간 집담회도 가졌다. 또 한 가지 욕심을 낸 일이 있다. 회갑도 지났고 혹시 다시 시작하는 병원을 방문하는 분들이나 친지들에게 드리려고 그동안 써온 수필들을 모아 ‘까치밥’이라는 수필집을 간행하는 일이었다. 재미와 함께 피로도 엄습했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5월초에 한수 가족이 3년간의 미국 수학(修學)을 마치고 돌아왔다. 5월 31일을 <세영정형외과>를 <세영정형외과 • 제활 의학과 의원>으로 개칭하고 다시 개원하는 날로 잡았다. 손자 지상(知相)이의 첫돌 날이기도 하고 장모님 구순이 되시는 날이 겹쳐 길일(吉日)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바쁜 일정이 마무리되고 병원도 다시 순조롭게 돌아가니 그동안에 쌓였든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혈압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짧지만 휴가철이 다가오자 휴식할 수 있다는 기대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바닷가에 누워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아무른 생각 없이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여러 스케줄들이 짧은 나의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손짓했다. 제일 먼저 나를 유혹한 것은 고등학교 동창인 권근술 교수가 주관하는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에서온 연락이다. 6월초 평양에서 <남북 어린이 어께동무>에서 만든 평양 어린이 병원이 완성되고 그 준공식을 하게 되었으니 함께 참석하자는 것이었다. 전세기로 한정 인원을 초청하여 평양과 백두산까지 여행할 수 있으니 이런 좋은 기회는 별로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병원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고 아들이 아직 우리 지역의 환자와 익숙하기 전이라 아쉽지만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8월초 연례행사인 우즈베키스탄의 중앙아시아 장애아 어린이 그림대회에 의료봉사에 올해도 참석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김 다니엘 목사님의 마음을 읽고는 거기에도 마음이 쏠렸다. 곧이어 함께 의료봉사를 다니든 심호식 교수님과 김인애 선생이 이번에는 캄보디아에 의료봉사를 가니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캄보디아에도 가보고 싶었다.
한곳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하던 차에 가산동에서 개원하고 있는 안 영규 박사가 8월 초 스리랑카 여행에 동행하자는 것이다. 그 나라의 위치나 특성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인도의 동남에 위치한 작은 야자수로 덮인 섬나라이고 휴양하기 좋다는 말에 단지 쉬고 싶은 마음으로 스리랑카 여행에 참가하기로 했다. 스리랑카가 옛 실론이라는 것을 여행 스케줄을 받고야 알았다.
유적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시기리아(Sigiriya), 일명 사자바위(Lion Rock)라는 장엄한 바위요새이다. 높이 370m의 화강암 봉우리의 가파른 정상에 왕궁이 있는 요새이다. 그곳에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품이고 전 세계에 알려진 벽화 <시기리아 레이디>가 있다. 1,400년 전에 암벽에 그린 18명의 미녀들이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며 지금도 살아 세계의 관광객들에게 유혹의 손짓을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된 바위정상의 왕궁 터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정상까지 힘들게 올라온 관광객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후손들에게 관광자원을 제공하고 있는 이곳도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피 냄새가 가득하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젊은 왕은 동생의 복수가 두려워서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미친 왕이 남겨놓은 세계적인 문화유산, 그것이 좋은 관광자원이 되어 후손들의 어려운 생활에 보탬이 되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자바위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은 해외의 오지여행은 젊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우리의 옛 노래는 참으로 적절히도 표현한다. 나는 헉헉거리며 힘들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서양의 젊은 한 쌍은 그 가파른 곳을 내려오면서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한다. 한 늙은 친구가 ‘부럽다! 부러워!’ 하니까 다른 늙은 친구가 맞장구를 친다. ‘글쎄 저놈들은 입 냄새도 없는 괴상한 동물이라니까! 내가 이태리의 한 광장에서 봤는데 남들이 보라고 하는지 광장 한복판 분수대 옆에서 꼼작도 하지 않고 키스를 하고 있기에 유심히 관찰을 하다가 내가 지처 다른 관광을 하고 2시간 후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보았더니 그때까지 꼭 같은 자세로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에이! 무슨 별말씀을? 이태리에는 그런 조각 작품이 많아!’ ‘아 내가 잘못 봤나?’ <숭례문>을 직접 본 사람이 보지 못한 사람과의 <남대문>시비에서 지는 순간이다. 그 외도 BC 3세기 경 불교 수도단의 창시자인 생가미타가 가져온 부처와 무화과나무를 잘라서 주위에 둘러쳐서 건설했다는 불교의 신성도시 아누라다푸라,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졌다는 조용한 농촌마을 미힌탈레, 5개의 바위 동굴로 만들어진 스리랑카 최대의 담불라 석굴사원, 고대 호반도시 플론나루와, 캐디 호반의 불치사 등도 관광할만한 곳이었다. 불제자들에게는 상당한 감명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곳이 스리랑카에는 많았다.
일행 중의 한사람이“우리나라에도 이런 유적이 하나 만이라도 있었으면!”하고 감탄을 했다. 거기서는 나도 별수 없이 맞장구를 쳤지만 서울에 돌아와 관악산의 넓은 마당바위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의 생각은 180도로 달라졌다. 내가 불제자는 아니지만 불제자의 입장에서 부처님을 생각해본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부처님은 내가 쉬는 이 마당 바위 같은 분이어야지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엉덩이를 부처님을 향하여 사진 촬영이 금지된 모심만을 받는 저 불상의 모습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부처님이 진정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분이라면 부처님은 불상에 계시질 않고 대자연 속에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선조들이 자랑할 만한 조각 솜씨를 가졌으면서도 인수봉 바위, 설악산의 바위, 금강산의 만물상 바위에 불상으로 조각하지 않은 것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바위에 조각한 불상이나 기타의 조각품이 아무리 웅장하다 하드라도 하나님이 조각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비길 것이 못되고 오히려 위대한 작품을 훼손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고승이 나무 불상을 쪼개어 불쏘시개를 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새삼스럽게 그 뜻을 이해할 것 같다.
스리랑카에 와서 발견한 진정한 보물은 구슬같이 빛나는 스리랑카 어린이들의 눈동자와 순진하고 해맑은 미소였다. 맨발의 스리랑카 어린이들의 다리는 곧게 뻗어 있었고 그들의 코도 오뚝하였다. 나는 클레오파트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가무잡잡한 이집트의 미인이니 ‘클레오파트라’의 어릴 때 모습이 저 처녀들의 모습과 닮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아이들을 보고 그러한 감동에 휩싸인 것은 수년전 이집트에 가서도 비슷한 감동을 느꼈으나 이번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느낌이 나만의 감상인가 했으나 같이 간 세계를 많이 여행한 일행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고 특히 일행 중 서울의 초등학교 여 교장선생님도 나와 꼭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검은 피부에 하얀 교복을 차려입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너무나 깨끗하고 그들의 순진한 미소는 나를 감동시켰다.
일인당 GNP가 겨우 800불 정도인 이 작은 섬나라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감탄과 질투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이 뒤따라 왔다. ‘그들이 3-40세를 넘어가면 왜 빨리 별로 볼품이 없어지는 것일까?’ 이집트나 스리랑카의 어린들의 준수함에서 과거의 문화 흔적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들 나라의 미래의 희망을 점쳐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나의 여행 중에 일어난 일시적인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밤하늘의 별과 달이었다. 밤하늘에 수놓인 너무나 영롱한 별들과 밝은 달은 호텔 수영장 벤치에 누워있는 나에게로 곧바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섬 전체가 푸른 야자수 등 밀림으로 덥혀 있는데 모기 등 곤충 한 마리도 달라붙지 않았으니 이 또한 신기했다. 올해 7월 중순 나는 시골 고향 나들이에서 온몸을 모기에게 물려 홍역환자처럼 되었다. 스리랑카에서는 모기 한 마리도 없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찾은 보물 3가지는 <구슬같이 반짝이는 어린이의 눈동자> <순진하고 밝은 미소> <밤하늘에 쏟아져 내려오는 별빛>이었다. 나는 항상 반지처럼 내마음속에 이 3 보물을 간직하고 다니다가 내 마음이 우울할 때면 끄집어내어 감상할 것이다.
2004/9 이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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