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梅月堂 金時習

含閒 2013. 2. 1. 13:37

 

 

梅月堂 金時習



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탄식하는 선비들이 있었다.
 "어떻게 두 왕을 섬기란 말인가!" 그들은 단종에 대한 의리를
져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한평생을 보냈다. 이들을 후세 사람들은
생육신이라고 부른다. 생육신이란,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를 말합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호는 매월당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4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세종은 기특해서 상으로 비단 오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너 혼자
가져갈 수 있겠는가?" 다섯 살 난 꼬마
김시습
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자.
"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끝자락들을
잇기 시작했다. 그는 줄줄이 사탕처럼 묶은
비단을 끌고 집으로 갔다고한다.

"어린 녀석이 참 기특하군!" 이 일이 있은 후,
세종은 더욱더 그를 아꼈다.
김시습
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는 삼각산에 있는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우며 울었다고한다.

"나라가 어지러운 이 때 공부는 해서 뭐해!"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삿갓을 쓰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김삿갓이라 불리게도 되었다.

 


매월당 김시습 영정


◈ 작가의 생애와 일화

15세기 한국사상사를 대표하는 김시습
문학사의 전개에 있어서 <금오신화>란 한문소설을
창작한 인물인 동시에, 유교의 이기철학과
불교의 화엄사상, 그리고 선도의 내단사상을
한몸에 지닌 사상가이면서, 세조의 찬탈로 인한
왕권교체의 충격을 감당해야 했던 불우한 선비의
전형이기도 하다. 김시습의 모순된 행적과
그의 사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행적과 사상을 각기 개별적 현상으로
따로 다룬 관계로 그를 나쁘게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김시습은 고려말 길재 등으로부터 전승된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생육신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에 의탁한 행적이 문제되어 유학사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김안로가 일으킨 여러 차례의
옥사 이후에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매월당으로
지칭될 정도로 사후에 그의 청절이 인정되었다.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이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뜻을 잃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뒤로는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는 한때 오세암에 은거했었다. 선가에서는
그가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선도를 닦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선가서인 해동이적과
해동전도록에 자세히 쓰여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에게 선도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이다. 김고운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본명히 설현이었다. 설현은 고려 때 우리 나라에
유람차 왔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렀다가 권청 진인을 만났다.
권진인은 영생불사하는 선인이 되어 최치원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 머문다는 분이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다.
훗날, 설현은 명오라는 스님을 서대산에서 만났는데,
명오스님한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설현은
명오스님의 지도에 따라 8년 동안 수행하여 득도했다.
설현은 득도하자 곧 선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도를 전수해줄 제자를 만나지 못해 인연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다.
이름을 바꾼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백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통감>을 가르쳤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

김고운은 조선
세종 18년(1436)에 드디어 선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에서 만났다.
당시 매월당은 팔팔한 청년이었다. 또 자기를 극진히
아꼈던 세종이 아직 왕위에 있던 때였으니,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싶었다. 김고운이 매월당에게
수도하라 권했지만, 매월당은 관심이 없었다.


그후,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 김고운이 그를 찾아왔다.
매월당은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김고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열심히 선도를 닦았다. 김고운은 매월당에게
도를 전한 뒤에 수해선이 되었다. 수해선이란 몸이
물로 화했다가 선계로 올라가는 선인을 일컫는 말이다.

<해동이적>은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에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이 일찍이 설악산에서
은거하는데, 강릉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김시습이 그들의 인물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에서
매월당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지
어느덧 반 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스승이 온데간데 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최연은 김시습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는 체하고 있다가,
김시습
이 방을 나간 다음 곧바로 뒤쫓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와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다.

최연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너무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김시습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정색을 하고 최연을 꾸짖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너무 번거롭고 조잡하여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
물러가라." 최연이 백배사죄했으나, 김시습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김시습
은 도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이인들이다.
정희량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지냈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종적을 감췄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둬라. 그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
이 열반에 든 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 윤군평이 스승 김시습을 개성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 윤군평의 물음에 김시습이 이렇게 대답했다.

김시습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은 산 사람과
똑같았는데 얘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도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세암은
선계(仙界)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
선인이 되었다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

금오신화 작가 김시습(1435~ 1493)은
세종 17년 서울 교외에서 충순위의 벼슬을 하던 가난한
문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아직 돌도 되지 않았던 어느날, 이웃에 살고 있던
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아기인 김시습에게 문장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한다.

그는 세살이 되자 어려운 한문책을 줄줄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시의 재상 허조는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김시습
의 집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해 보았다.
“너는 시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허조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보였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이다.“이 얼마나 천재적인 표현인가! 너는 과연 신동이로다.”
재상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덧 궁중에까지 들어가자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은
김시습
을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들을 시켜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았다. 시험관의 무릎 위에 앉은 김시습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시 몇 수를 지어 보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매우 감동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천재라는 소문이
송도에 울려퍼지게 되었으며,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는
칭호를 받아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매월당의 필적


그러나
그가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왔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 결혼을 하면서 집으로부터
탈출하여 서울에서 떨어진 중흥사에 들어가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계유정란이 일어난 1455년,
당시 21세였던 김시습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추방하고
왕위를 탈취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릴 때 세종과의 약속을 삶의 큰 지주로 삼아 언젠가
세종의 손자인 단종 밑에서 큰 일을 하리라는 꿈을 품고
있었던 그인지라, 그 소식은 청년 김시습에게 너무나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사흘 밤낮을 방안에 틀어박혀
고민하며 통곡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부하기 위해 가져온
책과 지필묵 등을 모두 깨끗이 태워 버렸을 뿐 아니라
가위로 손수 머리털을 자르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이 때부터 그는 염세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일개
초라한 승려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러던 1456년 6월에 세조의 암살 모의에 대한 단서가
새어나가 성삼문 등이 극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시습
은 그즈음인 1456년부터 1457년까지 송도를
비롯한 평양일대를 계속 유람하며 <탕유관서록>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은 향토적인 풍물성을
띠고 있으나, 실은 그 속에 당시 통치계급들의 부패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다. 1457년 10월, 김시습
단종이 살해됐다는 말을 전해 듣고 8명의 동지를 모아
산 속에 사당을 짓고 세조정권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다.

이 소식이 세조의 귀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김시습은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일대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1460년 <탕유관동록>을 썼고,
또 호남지방을 돌며 1463년 <탕유호남록>을 썼다.

이렇게 장장 8년에 걸친 전국여행을 통해 그는 백성들의
생활실상을 알게된 동시에 구석구석에 만연한 권력층의
부패를 샅샅이 보게 되었다. 1464년 30세가 된 김시습
주거지를 강원도에서 신라고도인 경주 근처에 있는
금오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5년 3월,
효령대군의 추천을 받아 서울로 갔으나 권력사회 속에서
양심을 굽히며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따라
다시 금오산의 사당으로 돌아와 권력에 저항하며
살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는 소설 <금오신화>와 <유금오록>이라는
저항시를 썼다. 세월은 변하여 1468년 세조가 죽고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죽고, 세조 장남의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김시습에게
상경할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1471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유일한 마음의 친구였던 서거정이 ‘달성군’의 칭호를 받는
대귀족의 한 사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일관된 저항정신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1472년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쓰기를 계속했다. 그는 언젠가
서강을 여행하다가 보았던 세조의 수족인 한명회의 시를
인용해 자신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시를 짓기도 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러한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 ‘臥’자 대신 ‘汚’자를 넣어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며 이 시를 읊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김시습의 증오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그도 철저한 불교도가 되지 못하고 44세가 되던
1478년,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결국 환속할 것을 결심하고 유교의 법도에
따라 제사를 지냈을 뿐 아니라 새로 부인을 맞이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또 심기일변할 사건이 생긴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그가 서울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것이다.

그때가 1483년,
그의 나이 49세였다. 하지만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던 중 건강의 한계를 느낀 그는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라는 누추한 절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 절에서 1493년 2월에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매월당 김시습의
유물과 사상을 기리는 기념관이 강릉 경포호를
인접해 있다.
그의 본관이
강릉이라는 점때문에 이곳에 위치한 듯 한데
주위에
경포대와 오죽헌이 인접해있다
마치 오래된 고택과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대금 - 귀거래사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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