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장충단자리의 博文寺

含閒 2013. 1. 28. 09:58

 

 

민족의 치욕 - 장충단자리의 博文寺

 

장충단은 대한제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헌충원에 해당한다.일제는 이를 무참히 훼손하고 집밞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등박문의 보살사를 짓는다.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齊藤가 두 번째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정무총감인 고다마兒玉秀雄가 발의했다. 1930년 초 사찰 건립을 위한 ‘이토오공기념회'가 조직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친일파인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했다. 사찰의 명칭은 기념회 조직 때부터 이토오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로 정해졌다. 사찰 이름 앞에 붙이는 산(山) 이름으로는 이토오의 아호인 춘묘(春畝)를 써서 정식 명칭은 ‘춘묘산 박문사'가 됐다.박문사 종파는 이토오가 생전 귀의한 조동종(曹洞宗)으로 정해졌다.

설계는 이등박문공기념회공영부에서 완성하였으나 공영부장은 朝鮮總督府學務局장 하야시(林茂樹)가 담당하였고, 책임자는 사사 케이이치(笹慶一), 고문으로는 이토쥬타(伊藤忠太)이었다. 공사는 오쿠라쿠미(大倉組)토목주식회사에서 낙찰받았고, 1931년 6월 5일에 공사에 착수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살해당한 23주기가 되는 1932년 10월 26일에 낙성식이 실시되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그외 천여명이 참석하였다.

해방후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현지를 시찰하고 박문사를 없애고 그 자리에 영빈관을 짓게하였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슲은 우리역사의 한 단면이다

 

 

 

 
박문사 원경

 

 
박문사 부속건물(庫裏)

 

 
경희궁의 정문 경춘문을 옮겨 박문사의 정문을 삼었다

 

 

 

 

 

 


봉선화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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