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世宗과 黃喜

含閒 2012. 10. 31. 10:24

 

 

世宗과 黃喜

黃喜, 淸白吏와 黃金大司憲 사이에서
 

 
세종 대왕과 황희 정승

 

어느 겨울날, 퇴궐한 황희가 단벌인 옷을 벗어 부인에게 건넸다.

황희는 부인에게 옷을 뜯어 빨고 밤새 말려 꿰매면 내일 입궐할 때

입을 수 있을거라 이르고는 속옷차림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입궐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뜯어 빨아서 입을 옷이 없자 옷안에

있던 솜을 얼기설기 이어서 그 위에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황희를 본 세종은 황희의 관복 밑으로 나온 하얀 것을 양털이라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세종이 이에 대해 묻자, 황희는 사실대로

말했고 정승이 단벌로 겨울을 난다니 그럴 수는 없다며 세종은

비단 열 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황희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솜옷 한 벌로 과분하니 거두어달라 청했고 세종은 부끄러워 하며

비단을 내리지 않았다.

 

위의 일화처럼 황희에 관한 얘기들은 청렴하고 검소하면서 재치있고

너그러운 성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황희? 청백리! 명재상! 이라는 공식을 아주

잘 외우고 있을거고.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실록을 통해본 황희도 그렇다.

 

물론, 그게 황희의 잘못일까. 황희에게 청렴하고 검소한

이미지를 덧씌우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사람들과 아이들을

교육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 있던 복잡한 사연 탓이 클것이다.

 

황희는 이미 고려때 벼슬을 했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조선의 신하가

된 사람이다. 조선이 개국되었을때 황희는 서른의 나이였었다.

세종대에 가장 큰 활약을 하긴 하지만 이미 태종대부터 왕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 태종이 세자를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교체하면서 황희에게 시련이 닥쳤왔는데.......

양녕대군이 문제를 일으켰을때 세자가 어리다거나 하는 등의

말로 세자의 편을 들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너의 간사함을 미워한다,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면서

황희를 도성밖으로 쫓아낸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아첨하고 나중에 세자가 왕이 되면 그 덕을 보려 들러붙었던

사람들이 너무 미웠을 수 있고 황희가 그런 사람같아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세자를 새로 새웠으니 (사람)정리도

필요한 시점이였다.

 

황희는 세종 4년에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예순이었는데 세종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물러나있던 태종에 의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추천대로 세종은 말그대로 자신이 죽을때까지

황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세종보다 2년을 더 살아서 아흔살에 죽을때까지 삼십여년동안

황희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에 소문도 많았다.  

 

세종실록에는 황희가 대사헌이 되었을때 금을 뇌물로 받아서

사람들이 그를 황금대사헌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는 그가 간통을 했고 상속받은 노비가 많지 않았는데도

노비가 많았으며, 여러해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다. 관직을 사고 팔았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뇌물을 받아 형을 줄여주거나 면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또한 심술이 바르지 않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고도 하는데  이 기록은 세종실록이 편찬될때

문제가 되었다.

 

실록의 책임을 맡은 고위 관리들이 모여서 이 부분에 대해

'이런적은 없다' 고 하면서 고쳐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는데

이 기록이 남은것을 보니 삭제는 하지 않었다.   

 

 
황희 초상화

 

황희가 뇌물을 받고 간통을 저지르고 다른이를 중상했다.

는 얘기들은 정말 다 거짓말이고 헛소문일 수 있다.

원래 잘되는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쏠리는 법이니까.

그런데 황희는 실제로 청렴 결백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죄를 저지른적이 있다.

 

세종 9년, 황희가 예순다섯살 때의 일인데 황희의 사위

서달이 신창현이란 곳에서 아전을 때려서 죽게 했다.

황희는 신창이 맹사성의 고향이라 그에게 부탁해서 죽은

아전의 집과 화해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맹사성은 죽은자의

형을 달래는데 성공했고 서달의 죄가 세종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막는듯 했다. 하지만 예리한 세종이 발견했고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했었다

 

서달의 죄는 교형, 즉 교수혈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서달의 죄를 묻어버리려 했던 황희와 맹사성도

 파면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황희와 맹사성을 향한 세종의

 '신임'은 너무나 두터웠기에  두 사람은 곧 복직되고

서달은 외아들이라 사형을 시키지 않고 유배형을 내렸는데,

그것도 속으로 바치게 했다. 속은 즉 '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돈을 내고 벌을 받지 않았다는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판결에 대해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어찌됐든 황희가 청렴결백한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황희에 대한 별명과 모든 소문이

사실은 아니더라도 황희는 그렇게 가난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었다. 세종이 그를 그렇게 아끼고 봐주었던 것은 황희가

정말 능력있는 관리였기 때문일것이라 생각을 하게한다.

 

황희는 윤리적으로 완벽한 벼슬아치는 아니었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이였다. 그에 대해 안좋은 소문을 옮기는 기록에도

'일을 의논하거나 할때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었다' 라고

되어있다.

 

게다가 황희는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타입이었다.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게 아니라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왕 앞이라도 주저없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첨을 좋아하는 왕이라면 황희같은 사람이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세종은 그러한 황희의 태도와

능력을 높이 샀다.

 

 

 

유교의 나라인 조선시대의 벼슬아치에게는 언제나 완벽한

성인군자가 될 것이 요구되었지만 세종에게 필요한건

'공무원'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무척이나 불공평한 일이긴 했지만 탁월한 능력만

있다면 세종은 다른 모든 과실을 눈감아 주었다.

 

세종과 청렴한 재상 황희. 라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지만, 세종은 능력을 인정하면 다른걸 문제삼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무척이나 의외의 모습이지만

세종은 능력 위주로 사람을 썼고, 황희와 장영실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황희 초상화2

 

황희의 졸기에는 그를 칭찬하는 말들이 줄줄이 있다.

'너그럽고 후하고 침착하고 중후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넉넉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바르고 당당하여 대체(일이나 내용의 기본적인 큰 줄거리)를

보존하기에 힘썼다.'

 

황희는 아마 품성이 좋은 사람이였을것이다. 다만, 청렴이라는

원칙에 매달리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세종과 황희의 파트너십은 최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당시로써는 다소 논란이 있는 파트너십이었든 것 같아보인다.

 

이런 황희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 철두철미한 도덕성일까,

유연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실무능력일까?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본 황희 정승의 내용들이다.

 

 
가야금 -휘모리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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