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大王의 兄 孝寧大君의 손주며누리 於(乙)又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임꺽정이나 장길산에 관한 기록은 단 몇 줄에 불과 하지만, 어우동의 섹스 스캔들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대단히 소상히 기록되어있다.(성종실록에 6번등장) <성종실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적은 사관(史官)들이 등재를 꺼려했다는 기록까지 있고 보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종실 명문인 태강수 동(仝)에게 출가를 했던 탓으로 외명부 품계인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세종대왕의 형님(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그녀의 스캔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근친상간이 중복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종대왕의 현손)와 간통을 하고서도 또다시 육촌 시아주버님인 방산수 난(方山守 爛 : 세종대왕의 손자)과 통정을 했으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름을 자청(刺靑 : 문신)하기를 강요했다. 이리하여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게 되었고, 거리 감의동은 등에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그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병조판서 어유소와 직제학 노공필도 거명되어 있고, 현부의 도리 오종년과 같은 아전도 끼어 있으며 과거에 등가해서 유가길에 올랐던 홍찬은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사내중의 한사람이다.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동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어우동은 태강수와 결혼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쫓겨나서 친정에 와 있는다. 친정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어우동에게 한 계집종이, 오종년이란 사내를 소개해 준다. 이때부터 어우동의 남성편력은 시작된다.
적극적으로 남자를 유혹한다. 상대남자는 종친이나 재상 같은 고위층에서부터 젊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또 비단 양반 남성뿐만이 아니라 어우동은 노비도 자신의 상대로 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치를 받게 되었다. 조사가 거듭될수록 조정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문초하고 있는 상대는 왕실의 종친녀여서 설령 간통죄를 해도 극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왕실의 일원은 반역죄가 아닌 한 죽일 수 없는 것이 조선의 법률이었다.
종친인 그녀가 미천한 노비와도 관계를 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어우동의 처벌 문제를 둘러싼 조정대신들의 논의는 일년 내내 계속되었다. 왕실의 종친이므로 절대로 극형에 처할 수 없다는 신하들과, 아무리 종친이라도 지은 죄가 극형감이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신하들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된다. 해도 일벌백계를 위해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어우동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어우동 사건은 조선 조정을 수년 동안이나 들끓게 한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로 남았다 . 종친이라도 유교적 규범을 어긴 여성을 처형했다는 사실은 성범죄에 대한 위정자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총 3권으로된 소설 '어을우동'을 출판했다. 필자는 당시의 관행, 여속, 지리, 법도, 등을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현하면서 어우동의 내면에 잠재한 조선조 여인의 회한과 배신, 사랑과 증오를 담아내고 있다. 그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음을 역설하였고, 그의 역사소설, 역사드라마에는 '역사는 지나간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는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위에나오는 사진은 드라마에서 캡쳐한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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