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個人 박정희의 편지
◐ 군수기지 사령관때 → 朴正熙의 독한 편지 ◑
1960년 1월 하순 朴正熙 군수기지 사령관이 처음 기자들과 만나는 날 부산 문화방송 全應德(전응덕) 보도과장이 마이크를 갖다 대면서 “부임 소신을 피력해 달라”고 했더니 박정희는 마이크를 밀어버리면서 말했다.
“우리 뭐, 이런 딱딱한 분위기는 치워버리고 얘기나 합시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라 부산에 오니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뭐 물을 것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상투적인 ‘부임 소감의 피력’은 생략했다.
부산일보 軍(군) 출입 기자 김종신이 나섰다.
“부산에 있는 부대들은 말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오셨을 텐데 앞으로 부대 운영은 어떻게 해나갈 작정입니까?”
박정희 사령관은 한참 있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잘해 나갈 작정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박정희의 얼굴에는 엄숙함과 함께 기자들을 비웃는 듯한 冷笑(냉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 비웃음은 기자들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9사단 참모장 박정희 아래서 정훈장교로 근무한 인연으로 그 뒤로도 오랫동안 교분을 유지하고 있던 李容相(이용상) 대령은 그때 국방부 보도과장이었다.
그는 “박 장군은 具常, 張德祚(장덕조), 金八峰(김팔봉) 같은 문인 출신 언론인들하고는 절친했지만 다른 기자들을 대체로 경멸했고 기피했다. 기자들도 약점이 별로 없는 朴 장군을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기자들을 호칭할 때는 ‘그 자식들’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이용상은 “당시 일부 군장성들과 일부 軍 출입 기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부패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했다.
“일부 고위 장교들은 부정 때문에 기자들에게 약점이 잡혀 있었고, 또 언론을 통해서 경무대에 잘 보이려고 기자들을 매수하기도 했습니다. 軍의 문제점을 보도하는 데는 거의 자유롭던 시대이니 장성들은 기자들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출세에 이용하려고도 했지요. 6관구 사령관 시절 박정희 장군은 그런 기자들과의 접촉은 김재춘 참모장한테 맡겨 놓고 직접 만나지는 않으려 하더군요.”
기자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가는 장성들의 자세나 자질에 달린 것이기도 했다. 군수기지 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를 부산의 軍 출입 기자들은 달리 대하게 되었다. 젊은 기자가 젊은 장성들(그때 장성들은 거의가 30대였다)에게 친구처럼 접근하던 시절인데 박정희는 위엄이 풍겨 함부로 말을 붙이기도 어렵고 잡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신보의 薛英佑(설영우) 기자는 “朴 장군이 온 뒤에는 우리 기자들의 자세가 달라졌다”고 했다.
이 무렵 박정희의 心中(심중)을 엿보게 하는 편지 두 통이 있다. 한 통은 그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매형 韓禎鳳(한정봉)에게 보낸 편지이다. 韓 씨는 박정희보다 네 살 위 누님 朴在熙(박재희)의 남편으로서 그때 경북 상주에서 살고 있었다. 맞춤법만 손을 본 뒤 원문대로 옮긴다.
→ 時下寒冷之節(시하한냉지절), 氣體萬康(기체만강)하옵시고 누님께서도 安寧(안녕)하시오며 龍雄(용웅)이 男妹(남매)도 충실하다 하시오니 甚幸(심행)으로 생각하옵고 仰祝(앙축)하옵나이다. 저도 이번에 갑자기 命(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어려운 일을 맡게 되어 每日(매일) 業務(업무)에 奔走(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下送(하송)하신 書信(서신)은 잘 拜讀(배독)하였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지금 軍에서 장사를 한다든가 軍을 상대로 事業(사업)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不可能(불가능)한 일이고 더욱이 형님과 같이 資本(자본)도 없고 사업 경험도 없는 분은 絶對(절대) 可望(가망)도 없는 일이오니 기대하시지도 마시고 공연히 되지도 않을 일로 旅費(여비)까지 써서 이곳까지 오실 必要(필요)도 없으니 斷念(단념)하시기를 바랍니다. 勿論(물론) 兄(형)님의 딱한 사정도 잘 아는 바이나 되지도 않을 일로 오셔서 딱한 이야기만 하시면 저만 마음 괴로울 뿐이니 이 점 諒解(양해)해 주시기 伏望(복망)하나이다.
70만 대군이 쓰는 물자 공급을 책임진 군수기지사령부는 利權(이권)이 가장 많은 부대였다. 더구나 한정봉은 박정희가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때나 光復(광복) 뒤 박정희가 고향에서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매형이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매정하게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박정희는 쿠데타 구상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목숨을 거는 독한 결심을 한 마당에 사사로운 부탁은 더욱 그의 眼中(안중)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박재희 누님이 서울로 이사 오자 경찰관들을 집 주위에 배치하여 청탁자의 출입을 감시하도록 했다.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이던 때 제자였던 鄭順玉(정순옥)은 결혼하여 3남매를 둔 주부가 되어 있었다. 1959년 봄 박정희 1군 참모장에게 편지를 썼다. 박정희 소장이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것을 정순옥 할머니는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매형에게 보낸 편지는 살벌한데, 이 편지는 따뜻하다.
→ 20년 전의 추억을 더듬으면 천진난만한 순옥이의 소녀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지만은 지금은 3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니 모습도 많이 변했겠지. 뜻밖에도 보내 주신 서신 반가이 拜讀(배독)했습니다. 대구에 있을 적에 순옥이 부친께서 찾아오셔서 순옥이 이야기도 잘 듣고 泰泳(태영)이 이야기도 잘 들었는데 그 후 태영 군이 출정하여 소식이 없어졌다니 안타까워하시는 부모님의 심정 무엇에 비할 것인지. 순옥인들 얼마나 슬퍼했을까? 3남매의 어머니가 된 순옥이를 순옥이라고 불러서 어떨는지. 그러나 옛날 어릴 적의 생각으로 순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다정스러울 것 같으니 용서를 하시도록.
가끔 옛날 제자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소식을 듣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오. 그래 夫君(부군)께서는 무엇을 하시며 3남매는 모두 몇 살씩이나 되며 가정의 재미는 어떠하신지. 서울에는 나의 가족들도 살고 있으니 언제 한번 가족끼리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하고 있어요. 우리 집도 딸 형제를 가진 가정이 되었다오. 다음 기회에 가족 동반으로 옛날 이야기나 실컷 하도록 연락을 해주길 바라네. 친정 부모님들은 지금도 문경에 살고 계시는지? 사촌 復泳(복영) 군은 동래 병기학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그럼 내내 안녕하시기를 축복하오며 상봉의 기회를 고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붓을 놓겠습니다. 5월 1일 朴正熙 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개인적인 편지나 봉투에는 절대로 ‘대통령’이란 직책을 쓰지 않고 ‘朴正熙 拜’라고만 표기했다. 公的(공적)인 자리에선 찬바람이 일고 매정한 박정희는 私的(사적)인 자리에선 多感(다감)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朴正熙 傳記 제3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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