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지에 오른 추사체… 벗들이 있어 가능했다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展
국립중앙박물관서 오늘 개막

금박으로 장식한 분홍빛 종이 위에 힘 있게 써내려간 두 폭 대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쌍채필산호가(無雙彩筆珊瑚架), 제일명화비취병(第一名花翡翠甁)’. 7자씩 대구를 이룬 먹글씨가 춤추듯 유려하면서도 자유분방하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71세에 북청 유배 시절의 제자 요선(堯仙) 유치전에게 써준 것이다. 둘도 없는 붓을 꽂은 산호 붓걸이와 제일 아름다운 꽃이 피는 비취색 꽃병, 즉 귀하디귀한 기물이라는 문구를 가장 화려한 종이 위에 아끼는 제자를 위해 썼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11일부터 서화실에서 선보이는 주제 전시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에 이 작품이 나왔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에 이은 세 번째 주제전이다. 개막을 하루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홍준 관장은 “겸재와 단원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문인화풍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추사”라며 “겸재와 단원이 리얼리즘이었다면 추사의 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이 일치한다. 사실적인 것에서 사의적인 것으로 미적 기준이 바뀐 것”이라고 했다.

추사 개인의 예술적 성취보다 그가 맺은 인간관계에 주목한 전시다. 추사가 학문과 신분,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여러 사람과 교유하며 이룬 성과에 렌즈를 들이댔다. 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보물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비롯해 편지와 서예, 그림 등 38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스물셋에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가서 최신 학문에 눈을 뜬 추사는 옹방강·완원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유하며 역대 서법을 익혔고, 귀국 후 평생 이를 갈고닦아 추사체라는 독보적 서체를 완성했다. 추사 스스로 밝혔듯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산물이 바로 추사체다. 이수경 미술부장은 “추사체는 하나가 아니라 30대부터 70대까지 끊임없이 변화했다”며 “예서에서 시작해 어떤 글자도 똑같이 쓰지 않은 매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추사 말년의 원숙한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서화 3점을 ‘이 계절의 명작’으로 소개한다. 말년의 추사는 무심하게 쓱 그어도 최고의 글씨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과감한 운필이 살아있는 ‘산호가·비취병 대련’이 이번 전시의 백미다. 박물관은 “필획의 굵기 차이가 크고 조화로운 말년 추사체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며 “생애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은 걸작”이라고 꼽았다. 붓 가는 대로 그렸다는 난초 그림 ‘불이선란도’에서는 서화일치의 최고 경지를, 승려 해붕의 초상화에 붙인 찬문 ‘해붕대사화상찬’에선 골기만 남은 해서의 깊이를 감상할 수 있다.

추사의 편지와 서화 3점을 비롯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6점도 처음 선보인다. 34세 김정희가 ‘황해도 무관에게 보낸 편지’는 부친 김노경의 예조판서 임명과 자신의 문과 급제라는 영예로운 순간을 전하는 내용이다. 68세 무렵 자신이 지은 ‘석노시’를 쓴 ‘석노시첩’과 제주 유배기인 63세에 오숭량 그림에 지은 시를 쓴 ‘기유십육도시첩’도 처음 전시했다.

청나라 문인 주학년이 그림을 그리고 옹방강과 완원 등이 추사에 보내는 감상 글을 덧붙인 ‘소동파입극도’는 김정희와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유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박물관이 2023년 구입 후 처음 공개했다. 유홍준 관장은 “김정희가 지역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고, 학문의 경계를 넘으며, 옛것을 바탕으로 이뤄낸 탁월한 서화의 경지를 깊이 감상하길 바란다”고 했다. 11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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