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능이 있는 동구릉

含閒 2013. 9. 17. 11:25

 

                                                                 왕릉의 홍살문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능이 있는 동구릉

 

 

 

동구릉은 옛 추억이 서린 곳이다. 대학에 다닐 때 대법회(大法會, 대학 동아리)동기가 군대에 간다하여 오징어, 땅콩, 뻥튀기에 소주를 사들고 동구릉으로 야외송별회를 갔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것은 소주 파티에 뻥튀기를 사간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무슨 사유인지 논산훈련소에서 귀가조치를 받았다며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다가 고시에 붙어 대법관까지 지냈다.

 

그 당시 대법회 동기들과 서오릉도 가고, 고궁도 가고, 안양으로 자전거 나들이도 가고, 등교하여 첫 강의가 휴강이면 하루 종일 통금직전까지 당구를 친 적도 있다. 가정교사 월급이나 향토 장학금으로 낙원동 니나노집을 가기도 했다.

 

 

또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의 주선으로 그 친구의 고향 여대생 대학 친구들과 단체 미팅을 한 적도 있다. 이렇게 회상해 보니 비록 무미건조한 법과대학을 다녔지만 그런대로 제법 낭만을 즐겼던 것 같다.

 

오랫만만에 다시 찾은 동구릉은 그야말로 면모일신을 하였다. 그 당시는 여기서 술파티를 하여도 되었고 동네 어린이들이 무덤에 올라가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드 넓은 초원에 잘 가꾸어 진 경내는 마치 골프장을 연상하리 만큼 아름다웠고 주위에는 숲들이 우거져 과연 "신(神)들의 정원(庭園)" 다웠다.


동구릉은 조선왕조 임금님들의 왕릉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동구릉은 아니였고 동삼릉, 동오릉 하다가 고종을 대원군과 결탁하여 임금으로 만들어준 조대비가 묻히므로서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는 매우 역사가 깊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다. 통일 신라말기 승려 도선이 중국으로 부터 들여온 풍수지리설은 지금은 중국 보다 이론상으로나 토착화에 한발 앞서 있다.

 

 

풍수란 땅의기복( 起伏)과 물의 흘러가는 방향 등에 의해 생기(生氣)의 흐름을 읽고 지리오결(地理五訣)의 원리에 의해 땅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손이 조상의 덕을 보려고 묏자리를 찾는 명리술이다. 이 풍수지리는 조선조 때 극에 달하여 부모의 백골을 싸 질머지고 전국의 명당자리를 찾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예도 있다고 한다.

최근에도 어느 누구는 재수 끝에 조상의 묘를 옮기고 국가원수가 되었다고 하고 누구는 이장하고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의 도성을 정함에 있어 무학대사의 도참설에 의존했으며 역대 왕릉의 입지선정은 풍수지리를 절대적으로 따랐다.

조선왕조의 무덤은 모두 119기(基)이다. 그 119기의 무덤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제각각 명칭이 달라지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 "능(陵)"이 42기,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인 "원(園)"이 13기, 그외 왕족의 무덤을 "묘(墓)"라 칭하여 64기가 남아 있다.

왕릉은 도성에서 십리 밖, 백리이내에 입지해야 하는데 에외는 어디에나 있어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 정종은 개성에 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한때 세자였던 방석의 모)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생전에 신덕왕후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왕후의 사후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 형제를 죽이는 등 신덕왕후를 지극히 싫어했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현재의 자리인 동구릉에 안장하였다.

 

 

태종이 신덕왕후를 얼마나 증오했는가 하는 증표는, 신덕왕후 묘의 석물을 꺼꾸로 세워 광통교 지지대로 삼아 수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 지금 청계천에 내려가 보면 이 꺼꾸로 박힌 석물을 볼 수 있다.

조선조 제1대왕인 태조의 능인 건원릉은 풍수지리와 관상학에 조예가 깊은 하륜 등이 입지를 정했다. 하륜은 세자 책봉에 고심하던 이방원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이방원이 왕에 등극하는데 장자방 역활을 하였다.

 

 

 

 

태조의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 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 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와 왕릉을 조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태조, 문종, 선조, 현종, 영조 등 9기(基)의 능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태조가 안장된 직후 이곳을 찾은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는 이곳의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까?"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풍수지리설을 한번 생각해 본다.

자연에는 산이나 강의 형세에 따라 생기가 흐르고 있는데 이 기운이 많이 모이는 곳이 명당이다. 따라서 배산임수는 산 자나 죽은 자에게 모두 길지이다.

 

풍수에는 음택풍수와 양택풍수가 있다. 양택풍수는 주거지를 고르는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지리는 자연 속에서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산다.

집 뒷쪽에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배산임수 땅은 분명히 산 자에게 건강이나 심신 안정, 정서 함양 등 여러가지 복을 준다. 즉 길지(吉地)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음택풍수는 논리적이나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다. 신의 존재도 모르는데 어찌 지형만 보고 장래를 예언하거나 점(占) 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에서는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인간의 사후세계는 수천년간 연구해 왔지만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지하 수백 미터에 현실(玄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이집트 고도(古都) 룩소의 왕들의 무덤, 필립 2세의 무덤, 인도의 어느 왕비의 평안한 내세를 위해 지은 타지마할, 진시황의 묘 등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상의 평안한 사후세계 보다는 후손에게 복을 내려 준다는 개념으로 일종의 예언자인 지관(地官)의 힘을 빌려 묘자리를 정했다.

어느 곳이 명당인지는 묘를 쓴 뒤에야 밝혀 지는데 이것도 풍수지리가의 이현령 비현령식이다. 후손이 잘 되었으면 어쩌고저저고 하여 명당자리라고 하고 배산임수로 누가 보아도 명당자리인데 후손이 잘 풀리지 못 했으면 어느 트집이라도 잡아 흉지라고 꽤 마춘다.


시체 말로 무슨 풍수조사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의 묘를 답사한 다음 후손의 발복 여부를 평가하여 통계를 내어 풍수가 혹세무민하는 이론이라고 증명해야 할 것으로 본다. 눈에 보이는 양택풍수(陽宅風水)마저 신빙성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조선이 건국되어 개경에서 천도를 함에 있어 계룡산에 도성을 건설하다가 무학대사의 주장에 따라 한양으로 수도를 정했으며 그것도 하륜 등은 신촌 일대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산인 북악산이 현무, 낙산이 좌청룡, 인왕산이 우백호, 남산이 주작으로 4개의 산에 둘러 쌓여 있는 곳에 도성을 정해야 한다는 무악대사의 풍수지리설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선 제1대 왕인 태조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에서 이 풍수지리설이 옳은지 한번 생각해 보았다.

먼저 긍정적인 해석은 조선조가 517년 간이나 이어온 것은 도성의 터를 잘 잡은 덕택이라 볼 수도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 한,당,송,금,명,청나라 등 수 많은 나라가 명멸했지만 예외 없이 300년을 전후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정적인 해석은 많이 할 수 있다. 우선 5백년간 누려온 나라를 전쟁 한번 못해 보고 외국에 나라를 빼았긴 점이다.

다음 중요한 것은 조선조가 4개의 산에 둘러 쌓여서 정치, 사회, 군사, 경제, 과학, 문화 등 총체적으로 한발짜국도 나아가지 못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나의 설 익은 한양의 풍수지리설이다. 즉 4개의 산에 갇히여 국운이 한발짜국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본다.

정치는 조선이 멸망할 때 까지 절대 왕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19세기 서구는 입헌군주제 내지 민주주의로 변신하고 있었고 일본마저 명치유신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는 노비와 천민이 끝까지 존속되었고 여권(女權)은 철저히 무시 당했다.
군사는 2번의 왜란과 2번의 호란을 겪었음에도 군사력을 전혀 키우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문신을 우대하고 무관은 홀대하였다. 경제는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했고 심지어 피죽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기도 하였다.

과학은 세종대왕 시 장영실이 반짝 활약했으나 그 많은 전쟁의 피해를 입고도 무기 개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농경이나 생활 용품 등 실용적인 기구도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문화의 꽃인 시서화( 詩書,畵)는 선비들의 심심파적 거리였고 단원 김홍도나, 오원 장승업 등 궁정화가 조차 중인(中人) 계급으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예술은 선비의 취미생활을 벗어나 프로가 맡아야 한다. 그래야 위대한 작품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도자기조차 고려청자를 뛰어 넘지 못했고 도공(陶工)은 천민(賤民) 계급이었다. 연극은 성매매도 불사하는 사당패가 이끌었고 가죽제품 등 모든 공예품은 천민들의 작품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조 말 경 서울을 방문한 어느 서양인이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인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르는 이 말을 두고두고 써 먹었다. KAL기 잡지의 제목은 '모닝 캄'이다.


아침이 역동적이어야 나라가 발전한다. '일찍 일어 나는 새가 먹이도 많이 차지한다'는 격언이 있다. 조용한 아침은 모두 늦잠을 잔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게으른 사회가 어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이러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1970년대 초 강남이 개발되면서 4개의 산에 둘러 쌓여 있는 강북을 벗어나 서울의 인구가 서서히 강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서울의 도심이 강남으로 변신하여 갔다.

이와 궤도를 같이하여 대한민국은 세계로 뻣어나가 오늘날 경제는 세계 10위권 이내, 올림픽 5위, 반도체 1위, 유엔사무총장과 세계은행총재를 배출하였고 K-POP과 싸이는 세계의 젊은 이를 환호하게 하는 등 명실상부하게 세계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5백년간 현무, 청룡, 백호, 주작에 같혀 정치, 사회, 경제 등 총체적으로 한발짜국도 발전하지 못하던 대한민국이 사방이 확 트인 강남으로 도심이 옮겨지면서 나라의 운세가 풀린 것이라고 보면 억지일까?

파리나 뉴욕도 산 하나 없는 탁 트인 지세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강대국의 수도인 로마, 마드리드, 런던, 베르린도 한결 같이 답답하게 산 속에 둘러 쌓여 있지는 않다.

내 장광설의 결론은 간단하다.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풍광 좋은 곳에 조상의 묘를 쓰면 된다. 무덤은 어디 까지나 고인(故人)의 평안한 영혼을 위해 터를 골라야지 죽은 조상 덕을 보려는 이기심에서 묏자리를 써서는 안 된다.

                                                                                                      淸閑


 

The Blue Danube, Mary Schneider.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淸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