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선생 묘갈명(墓碣銘)
- 명문(銘文)은 고봉 기대승이 스스로 짓고 아울러 썼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古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융경(隆慶) 4년(1570, 선조3) 봄에 퇴계 선생은 나이가 70세였는데, 재차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致仕)할 것을 청했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가을에 또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축일에 선생께서 별세하시어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은 크게 애도하시며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례는 의정(議政)의 예를 쓰도록 명하였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슬퍼하고 애석해하며 서로 곡하고 조문하였다. 다음 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의 건지산(搴芝山)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정하여 살고 인하여 스스로 호로 삼았으며, 뒤에 도산(陶山)에다가 서당을 짓고 또 도수(陶叟)라고도 불렀다.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6대조 석(碩)은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인 자수(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비는 숙인(淑人) 권씨(權氏)이다. 증조의 휘는 정(禎)인데 벼슬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조(祖)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 진사(成均晉士)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禮安)으로 이거하여 온계리(溫溪里)에 거주하였다. 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인데 성균 진사로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선비(先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춘천 박씨(春川朴氏)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출생하신 지 한 돌이 못 되어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는 숙부인 송재공(松齋公)에게 수학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더 스스로 각고하였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옮겼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유년(1537)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그 후 삼년상을 마치고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홍문관부교리 겸 세자시강원문학(弘文館副校理兼世子侍講院文學),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냈으며, 다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옮기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휴가를 얻어 성묘하였다.
다음 해인 갑진년(1544) 봄에는 홍문관 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고,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으로 천직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으며,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되었다가 전한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간신 이기(李芑)가 삭탈관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얼마 후 이기가 또다시 삭탈관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는 휴가를 받아 외구(外舅)를 장례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음 해인 정미년(1547) 가을에는 응교로 임명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서울에 도착한 다음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1548)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풍기(豐基)를 맡았다. 기유년(1549) 겨울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를 박탈당하였다.
임자년(1552)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옮겨졌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1555) 봄에 휴가로 있던 중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르는 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1558) 가을에는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고 부르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니 대사성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는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을축년(1565) 여름에는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기거하였다. 겨울에 상이 특지를 내려 부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병인년(1566) 1월에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했는데, 서울에 올라오는 도중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선생은 마침내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벼슬이 체직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 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6월 도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이 뒤를 이었다. 금상이 선생을 예조 판서로 임명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는 명을 받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상이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 1월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받기 어려운 의리를 극구 말하였다. 또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체차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7월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양하고 글을 올려 6개 조항을 아뢰었으며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그 후 대제학과 이조 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사년(1569) 3월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면서 그치지 않았다. 상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인견(引見)하여 타이르시고 역졸로 하여금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달에 선생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병환이 위중해지자 아들인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명(遺命)이라 칭하고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며,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가 전면(前面)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서 미리 명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뤄 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가운데 보관되어 있으니 찾아서 써야 한다.” 하였다. 준은 이 경계를 받고 선생이 별세하자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遺戒)에 따라 그 명문을 그대로 썼다.
아,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활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귀(依歸)할 곳이 없다.
남기신 경계 말씀을 엎드려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가 없으나, 묘도에 게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을 또한 안 할 수 없으므로 그 대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말을 붙인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함양하고 결점을 고쳐 나갔다. 중년 이후로는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 힘써서 미묘한 진리를 환히 꿰뚫어 충적(充積)하고 발양하여 사람들이 측량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은 겸허하고 공손하시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였다. 날마다 공부를 새롭게 하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그치지 않았다.
출처와 거취의 문제에 있어서는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 자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를 추구하고 또한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 논저는 반복하고 무궁하며 광명하고 위대하여 한결같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말씀으로 헤아려 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적다. 선생 역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이를 만하니, 아, 훌륭하다.
선생은 재취하였다. 먼저는 모군(某郡) 허씨(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는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생산하였으며, 뒤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봉사 권질(權礩)의 따님이니,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장자 준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고, 채(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셋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 생원이고, 다음은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선비인 박려(朴欐)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는 적(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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