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영국재상 디즈레일리와 그의 하녀

含閒 2013. 3. 5. 10:50

 

 

영국 재상 디즈레일리와 그의 하녀

 

영국수상 디즈레일리가

젊었을 때 하녀 한 명을 구하고 있던 차에 추천을 받은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디즈레일리는

그 여자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이 만약

스무 장의 접시를 포개들고 이 방을 나가다가 문턱에

발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하겠소?"

그 여자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 정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그 순간 턱으로

접시를 단단히 누르고, 얼른 무릎을 끓겠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아

넘어진다고 해도 몸을 굴려서 접시를 한 장도

깨지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여자가 왔다.

같은 질문에

그 여자는 다만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직 그런 일을

격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발이 문턱 같은 데 걸리지 않도록 미리 조심은

하겠습니다."

디즈레일리는

그 두번째 여자를 채용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하녀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녀에서

일약 영국총리의 부인이 된 그녀는 나중에

이런 일화를 남겼다.

어떤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가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국회에서 할 연설문을 손질 하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사실은 마차문이 잘못 닫히면서

부인의 손가락 하나가 문에 끼워진 상태였다.

부인은 남편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마차가 국회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차가

도착하고 나서 보니 부인의 손가락은 새파랗게

멍이 든 채였다.

디즈레일리 같은

명재상의 뒤에는 또 그만한 부인이

있었던 것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국회에서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각종 통계 수치를

조목조목 인용해 대답해서 대응했다고 한다.


대답을 할 때마다 그는 항상 메모지를 보면서 조리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총리는 그날도 자신의 특기를 살려 숫자가 포함된

통계 및 수치를 인용해서 의원들의 말문을 막았고, 자리로

돌아올 때 실수로 메모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평소 총리의 답변에 감탄하던 한 호기심 많은 국회의원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 메모지를 본 의원은 깜짝 놀랐다.

총리가 열심히 참고했던 것처럼 보이는 그 메모지는 숫자 하나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던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과 지독한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고 하며 통계를 불신했다.

하지만 답변할 때는 언제나 통계를 이용했다.

숫자에 밝았던 그는 세세한 통계 수치를 통째로 외워서 답변했다.

메모를 보는 행동은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한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과 지독한 거짓말, 그리고 통계.’ 소설가 출신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어록 중 일부다.

통계를 불신했다지만 그는 숫자에 밝았다.

세세한 통계를 통째로 암기해 질의에 답변했다.

유대인 출신인 그가

영국 총리에 오른 두 가지 비결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남달리 비상한 머리와 치밀한 준비다.

다른 하나는 돈.

1804년 12월21일 태어난 그는 부친의 재산과 기독교로의 개종 덕에

명문고교를 다니고 마음껏 해외여행도 누렸다.

부친은 두번째 결혼에서 얻은

지참금으로 주식투자에 성공한 인물로 디즈레일리가

소설을 쓰고 스무살 나이에

일간신문 창간을 추진하며 정계에 입문(34세)한 것도

집안의 재력 덕분이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특징은

싸움꾼. 번번이 당론에 반대하는 사조직을 이끌며

세를 불린 끝에 두 차례(1868, 1874~80) 총리에 지명된 그는

분쟁을 통해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영국의 이권 극대화에 전력한 인물로 꼽힌다.

남편 앨버트공과 사별한뒤 윈저궁에

10년간 칩거하던 빅토리아 여왕을 국정에

복귀시킨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영국의 상징으로서

왕실의 존재가 이때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면서도

가장 영국적인 총리’‘제국주의자’로 불리는 디즈레일리를

뒷받침한 것은 유대 자본이다


수에즈 운하 매입 등

중요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로스차일드 등 유대계가

자본을 댔다.

1881년 세상을 떠난

디즈레일리는 이스라엘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 철자에서

앞뒤로 한 자(d·i)씩 만 빼면‘이스라엘(Israel)’이 된다.

 
Vienna Boys Choir - soundsof spring waltz.mp3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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