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모자의 나라, 조선

含閒 2012. 12. 9. 08:34

모자의 나라, 조선

 
조선은 ‘모자의 나라’로 불렸다. 계절·신분·성별 등에 따라 온갖 꼴의 모자를 갖춘 조선 특유의 ‘쓰개 문화’ 덕분이다.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했던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이렇게 전한다. “단편적인 묘사만으로 조선 모자의 가치를 다 보여주기 어렵고 품위에도 맞지 않다.” 모자를 외출용 장식품으로 사용하던 서양인에게 조선의 다채로운 모자가 꽤 신기했던 모양이다. 다른 기행문을 보더라도 조선을 ‘모자의 왕국’ ‘모자의 천국’ ‘모자의 발명국’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다양한 모자와 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이한길 기자

앉으면 몸 전체 덮을 정도로 커진 갓…왕실서 ‘축소 정책’ 썼답니다

남자 모자

흑립
뒤로 갈수록 커지다 대원군 때 작게 변해


갓의 본래 이름은 ‘흑립(黑笠·검은 갓)’이다. 옻칠을 했다는 뜻에서 ‘칠립(漆笠)’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반들이 주로 외출용으로 썼는데, 사대부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모자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사람을 대할 땐 반드시 갓을 써야 했다. 조선사 600년 동안 갓의 모양도 유행에 따라 변화했다. 연산군 시대엔 모자 꼭대기가 뾰족하고 아래는 넓은 갓이 유행했다. 고깔 모양과 비슷한 형태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그린 갈모를 쓴 조선 사람.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제공]
다음 왕인 중종 때부터는 모자 높이가 높아지고 모자 챙은 좁아졌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부터는 모자의 높이가 더 올라가고 챙도 넓어진다. 출입문을 드나들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 가격도 비싸져 조선 정부가 모자의 크기를 줄이려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모자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 순조 때는 우산처럼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커졌다. 흥선대원군 시대가 돼서야 작은 갓으로 개량된다.

갓끈도 다양하다. 영·정조 때는 호박을 엮은 긴 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다듬은 대나무 올을 엮어 옻칠을 하고 붉은 실을 감은 갓끈은 왕이 쓰던 것이다. 옥으로 해오라기를 조각해 갓 꼭대기에 붙이기도 했다. 선비들의 고고했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백립(白笠)
평상시에 썼지만 점차 국상 때만 써


흰색 갓. 조선 초기엔 평상시에도 쓰고 다녔지만 점차 국상(國喪) 때만 쓰게 됐다. 대나무로 엮은 갓에 흰색 천을 둘러 만든다. 국상 때면 모두 백립을 써야 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명성황후는 국상을 두 번 치렀는데,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보면 두 번의 국상으로 백립 가격이 폭등하자 백성들이 “왕비가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줬다고 백립을 쓰느냐”라며 갓에다 흰 종이를 붙이거나 그냥 검은 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망건(網巾)
최고급 제품 재료는 사람 머리카락


머리가 길었던 조선 남자들의 경우 긴 머리를 단정히 한 뒤 갓을 써야 했다. 상투를 쓸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게 망건이다. 그물 모양과 닮았다는 뜻에서 망건이라 이름 붙였다. 보통 말총으로 만드는데 최고급 망건은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다. 특히 경남 통영산을 좋게 쳤다고 한다. ‘곱소리’라 불리는 코끼리 꼬리털로 만들기도 했다.

중국에서 유래한 망건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몽고족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나라 때부터 변발 풍습이 유행하면서 더 이상 망건을 만들지 않게 됐다. 망건 생산이 중단되자 조선 망건이 중국에 역수출되는 일이 생겨났다. 중국에 간 조선 사신의 망건이 도난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탕건(宕巾)
벼슬아치들이 쓰는 갓 맵시 잡기용


흔히들 ‘감투 쓴다’는 말을 쓴다. 공직이나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쓰는 말인데, 감투는 탕건의 다른 말이다. 탕건은 망건 위에 쓰는 모자로 망건을 덮어주고 갓의 모양을 잡아주는 기능을 한다. 탕건은 벼슬아치만 썼기 때문에 ‘감투 쓴다’가 ‘벼슬에 오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고 한다. 독도의 서도 북쪽 끝에는 탕건을 닮은 바위가 있는데, 탕건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탕건봉’으로 불린다.

상투관(上套冠)
서민층은 종이로 만들어 써


남자들의 상투 머리에 쓰던 작은 관이다. 망건을 쓴 다음 그 위에 썼으며 작은 비녀를 꽂아 고정했다. 주로 왕과 사대부 집안에서 사용했다. 가죽·나무·뿔 등에 검은 칠을 해 만들었으며, 머리 정돈과 머리 장식품으로 썼다. 서민층이나 머리 숱이 적은 노인들이 사용한 관은 종이나 베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면류관(冕旒冠)
왕세자 여덟 줄, 왕 아홉 줄, 황제 열두 줄


왕은 그 지위상 모자도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왕과 왕세자가 즉위식이나 결혼식 등 큰 행사 때 쓰는 모자가 면류관이다. 면류관은 모자 위에 긴 판이 있고 앞뒤로 구슬을 꿴 줄을 달았다. 이 줄을 ‘유’라고 한다. 유를 몇 개 달아야 하는지는 『국조오례의』에 나와 있다. 왕은 아홉 줄, 왕세자는 여덟 줄을 단다. 그런데 구한말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유가 열두 줄로 바뀌었다.

중요한 행사 때 쓰는 모자인 만큼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유에는 왕의 시야를 가려 악을 보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면류관 양 옆에 달린 작은 솜뭉치는 귀를 막아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간신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모자의 형상에 담아냈다.

전립(戰笠)
무관·포졸들이 쓴 조선시대 ‘철모’


역사 드라마에서 무관이나 포졸들이 쓰고 나오는 검은색 벙거지가 바로 전립이다. 철모가 총알과 파편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듯 조선시대 전립도 적이 쏘는 화살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품계가 높은 무관은 공작새 깃털이나 금으로 장식을 달기도 했다. 하급 무관들의 전립은 주로 값싼 돼지털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립에 관한 권율 장군의 일화가 있다. 권율은 전투가 벌어지면 진지를 누비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는 병사의 전립에 칼로 표시를 해뒀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뒤 전립에 표시가 돼 있는 병사들은 즉결 심판에 처해졌다.


여자 모자

화관(花冠)
점점 커지는 가체의 폐단 잡으려다…


양반 가문에서 결혼이나 경사가 있을 때 쓰던 의례용 관이다. 화관이 보급된 건 영·정조 이후라고 한다. 조선 중기쯤 여자들 사이에 가체(加髢·부인들의 머리 위에 얹는 큰머리)가 유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유행을 따르느라 머리카락을 사고파는 등 폐단이 심해졌다. 가체의 크기와 화려한 장식이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영조 때는 열세 살짜리 며느리가 무거운 가체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은 일도 있었다. 아침 문안 인사를 가려고 방에서 가체를 쓰고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갑자기 들어오자 급하게 일어서다 사고를 당했다.

조선 정부는 이 같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화관을 권장했다. 하지만 화관이 보편화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벌어졌다. 옥이나 금·조개 등으로 화관을 장식하는 데 사치하는 여성이 늘어난 것이다. 가체든 화관이든 과도한 꾸미기와 사치가 조선 시대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셈이다.

족두리
노론은 오목한, 소론은 볼록한 모양


화관과 마찬가지로 예복을 입을 때 쓰는 관이다. 고려시대 몽고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때부터 유행해 영·정조 때 가체를 대신하기 위해 보급됐다. 머리를 틀어 올려서 쪽을 지고 그 위에 족두리를 얹는다. 요즘도 결혼식이 끝난 뒤 폐백을 할 때 족두리를 쓴다. 조선 시대엔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 싸움이 심각했는데,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고 부르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고 불렀다. 두 당파는 같은 마을에 살더라도 왕래하지 않고, 길을 가다 마주쳐도 인사를 나누지 않을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옷깃의 길이나 제사 형식, 시부모님에 대한 호칭도 서로 다를 정도로 생활 양식도 차이를 보였다. 족두리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노론파는 오목하게 들어간 겹족두리를, 소론파는 볼록한 홑족두리를 썼다고 한다.

굴레
돌부터 네댓 살까지 쓰는 양반집 모자


돌 무렵부터 네다섯 살까지 양반집 여자 아이들이 많이 쓰던 모자다. 돌 지날 때쯤부터 쓴다고 해서 ‘돌모자’라 불리기도 한다. 굴레와 관련해 전해지는 조선시대의 재미있는 풍습 하나. 딸이 환갑을 맞았을 때 부모가 살아있으면 환갑 맞은 딸이 색동저고리, 다홍치마를 입고 굴레를 쓴 채로 늙은 어머니 무릎에 안겼다고 한다

날씨에 따라

삿갓
햇볕·비 막거나 외출 여성이 얼굴 가리거나


방랑 시인 김삿갓 덕분에 잘 알려진 모자다. 주로 천민이나 방랑객이 썼던 삼각 모양의 모자를 일컫는다. 갈대나 대오리로 거칠게 엮어 만든 삿갓의 용도는 매우 다양했다. 농사를 지을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기도 했고, 비 오는 날엔 우산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서민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기도 했다.

풍차(風遮)
방한용 두건…뒤에서 보면 풍뎅이꼴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쓰는 방한용 두건이다. 뒷목·귀·볼을 모두 감쌀 수 있도록 뒷부분이 목덜미까지 내려오고 귀와 볼을 감싸는 ‘볼끼’가 달려있다. 풍차는 독특한 모양 때문에 ‘풍뎅이’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뒤에서 보면 풍뎅이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직접 보고 싶다면

옛날 여인들의 생활문화, 화장문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문 화장미술관이다. 코리아나화장품(주) 회장 유상옥(兪相玉)이 30년간 수집한 화장도구와 규방에서 쓰는 물건들을 모아 2003년 11월 20일 개관하였다. 코리아나화장품(주)의 복합 문화공간인 스페이스 시(space*c) 건물 5~6층에 자리잡고 있다.
 문의 02-547-9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