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書法作品)

[스크랩] 대표적 서예가 한호(석봉)

含閒 2012. 7. 10. 12:28

 

 

 

한호(韓濩, 1543~1605)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서예가일 것이다.

한호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도 한석봉(韓石峰)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 최고의 수준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취와 평가 없이 너른 명성을 얻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대중적 명성과 다작(多作)은, 이른바 ‘순수 예술’에서 특히, 그 작품과 작가의

수준에 대한 평가에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지적한

이런 경향들은 한호의 예술 세계와 적지 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가계와 출생

한호의 본관은 청주(淸州)고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이다. 그의 가계는 그렇게

현달하지 못했다.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은 그의 선조를 5대조 한대기(韓大基)

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의 벼슬은 군수였다. 군수를 한미한 직책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부당하지만, 현달한 관직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한호는 1543년(중종 38) 개성에서 태어났다. 점치는 사람은 “옥토끼가 동쪽에서

태어났으니 서울의 종이 값이 오를 것”이라고 예언했고, 부모는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자신의 글씨를 주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이런 조짐들은 적중했다.


한호의 행서 글씨. 해서, 행서, 초서 등 각 서체에 능했던
그는 중국 서체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호쾌하고도 강건한
서풍을 이루어 후의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서도의 쌍벽이 되었다.

 

한호는 1567년(명종 22) 2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확한 까닭은

알기 어렵지만 그러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글씨로 사자관

(寫字官)에 발탁되어 오래 근무했다. 사자관은 승문원(承文院, 정원 40명)ㆍ

규장각(奎章閣, 정원 8명)에 소속되어 말 그대로 글씨를 쓰는(模寫) 관원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서인 국왕의 어서(御書)와 외교문서의 필사를 전담했다.

한호가 명필로 이름나게 된 중요한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외의 인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성가(聲價- 세상에 드러난 좋은 평판)였다. 그러니까 그는 당시의

전세계라고 할만한 모든 지역에서 명필로 평가받은 것이었다.

한호가 중국에서 명필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5차례의 중국 사행이었다.

그는 1572년(선조 5)에 정유길(鄭惟吉), 1582년(선조 15)에 이이(李珥),

1601년(선조 34)에 이정구(李廷龜)의 사행과 1581년(선조 14)

ㆍ1593년(선조 26) 주청사(奏請使)가 파견될 때 사자관으로 동행했다.

그때 그의 글씨를 본 중국의 일급 지식인들은 감탄과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명대 후반의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王世貞)은 그의 글씨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고 평가했고,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 또한 “왕희지ㆍ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격찬했다.임진왜란에 참전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 ㆍ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 등도 그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갈 정도였다. 그의 출세에 가장 크고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보다도 국왕

선조(宣祖)의 호평이었다. 선조는 한호의 큰 글씨(大字)를 보고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국왕은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자주 하사했고, 사자관이던 그에게 문반 벼슬을 제수했다.

그런 배려로 한호는 정랑(正郞)과 가평(加平)군수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선조의 후대를 이렇게 적었다.

한호는 임금에게 지우(知遇- 인격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잘 대우함)를

받아 총애가 융숭했고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가평 군수에 임명

되었는데, 몇 년 뒤 사헌부에서 탄핵했지만 추고만을 지시했다. 그가 공조

낭관이 되었을 때는 일상적인 업무를 규칙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되는 것이

마땅했지만 주상은  처벌하지 말라고 하명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어의에게 빨리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오랫동안 애도했다

 

또한 선조는 한호가 중년에 공들여 쓴 작품 대부분을 대궐로 들이고 여러 차례에

걸쳐 특별한 선물을 하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자신이 소장한 특상품의

벼루 원석을 주면서 잘 다듬어 사용하라고 한 것이었다. 서예가에게 이것은

최상의 선물이자 예우였을 것이다.

 

당시의 평가들

한호가 쓴 것으로 알려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의
건물인 ‘민구재’의 편액 글씨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

 

이처럼 한호는 국내외의 주요 인사들에게서 격찬에 가까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상대적으로 폄하된

결정적인 원인은 비교적 한미한 그의 가문과 벼슬이었다.

한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면서 형조참판(종2품)을 역임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다녀온 최립(崔笠, 1539~1612)은 이런 세태를 통렬히 비판했다.

말세(末世)의 습속(習俗)을 보면, 남의 평가를 귀동냥한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천시하며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벌(門閥)만을 따져 평가하기 때문에 경홍(한호의 자-인용자. 이하 같음)의

글씨도 잘못된 비평을 받는 때가 있다. 그럴 때 경홍은 마음 속으로야 그런 비평에

흔들리지 않겠지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하는 때도 있었다.


일찍부터 나는 경홍과 관련해 이런 세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은 경홍의 손에서

그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멋대로 비평을 가했던 것인데, 만약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법첩(法帖)을 임서(臨書)한 경홍의 글씨를 금석(金石)에

새겨 왕우군의 작품과 뒤섞어 전하게 한다면,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별해 낼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간이집(簡易集)] 제3권).

 

최립의 타당한 비평처럼, 한호가 명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최립이

지적했듯이, 조선시대는 문벌이 매우 중요했고 모든 탐스러운 가치들은 대부분 그리로

귀속되고 그것에 따라 좌우되었다. 또한 서예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고매한 정신에서

나오는 수준 높은 예술로 평가되었기에 뛰어난 서예가들도 유명한 학자나 관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호는 자신의 사상이나 문학을 담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신 세계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예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그의 글씨는

단정하고 아름답다. 그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수준 높은 예술의 힘일 것이다.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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