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제오강정(題烏江亭)

含閒 2009. 11. 18. 10:24
두목(杜牧:803~852)의 시〈제오강정(題烏江亭)〉
 



勝敗兵家事不期 승패병가사불기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包羞忍恥是男兒 포수인치시남아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江東子弟多才俊 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증래미가지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인데


 

捲土重來: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온다 (한번 실패한 사람이 다시 분기하여 세력을 되찾는다는 것)

捲:걷을권. 말 권.

包羞忍恥:부끄러움을 참고 치욕적인 모욕을 견딤

 


오강[烏江:안휘성(安徽省)내]은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B.C. 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 유방(劉邦)과 해하(垓下:안휘성 내)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江南, 양자강 하류 이남의 땅)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을 돌아가[無面 江東]’ 부형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 만장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 ꠏꠏꠏ 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 초가(四面楚歌)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 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은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읊었고, 사마천(司馬遷)도 그의 저서《사기(史記)》에서 ‘항우는 힘을 과신했다’고 쓰고 있다.

 

杜牧 803 ~852.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828년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후에 황저우[黃州]·츠저우[池州]·무저우[睦州]·후저우[湖州] 등에서 자사(剌史)를 지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시(詩)에서 이상은(李商隱)과 나란히 이름을 날려 '소이두'(小李杜 : 작은 李白·杜甫)라고 불렸다. 고시(古詩)는 두보·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 〈감회시 感懷詩〉·〈군재독작 郡齋獨酌〉 등은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박진회 泊秦淮〉·〈산행 山行〉·〈강남춘절구 江南春絶句〉와 같은 소시(小詩)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즐겨 읊어왔다. 〈적벽 赤壁〉·〈제상산사호묘 題商山四皓廟〉·〈과화청궁 過華淸宮〉 등 사적지를 읊은 절구는 그 필치가 기발하고도 힘이 넘친다. 그의 산문은 당 말기에 일가를 이루어 엄격하면서도 맑고 유창했다. 또 산문의 필법과 구법(句法)으로 부(賦)를 지었다. 예컨대 〈아방궁부 阿房宮賦〉 같은 것은 서사(敍事)·서정(抒情)·의론(議論)을 하나로 묶어 육조시대(六朝時代 : 222~589) 이래로 사부(辭賦)가 날로 화려한 변려체로 되어가던 추세를 뛰어넘었다. 문집으로는 〈번천문집 樊川文集〉이 있으며 청대 사람인 풍호(馮浩)가 〈번천시집주 樊川詩集注〉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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