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在生活裏)

목뼈에 철심 박힌 김 목사님

含閒 2009. 7. 5. 02:45

남산편지 908 목뼈에 철심 박힌 김 목사님



                                www.nsletter.net 정충영 교수



충남 천안의 바울선교교회에서 김성은 목사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어느 날 평신도 신분으로 교회 목사를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선교하러 갔다가 북한 인권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강을 따라 하루에도 수 십구씩 굶어 죽은 시신이 떠내려 왔어요. 강가에 서 있는데 남자 아이가 다가와 옷깃을 잡고 말을 걸었어요. '같은 동포끼리 같이 삽시다.' 라고. 누더기 옷에, 손이 갈라진 논바닥처럼 어찌나 거칠던지…."



두만강변의 '꽃제비'들을 잊지 못한 김 목사는 귀국 후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을 떠도는 북한 주민들을 남한에 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헌 옷을 모아 그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했습니다. 옷가지 수백 벌을 넣은 대형 여행 가방을 좌우로 목에 건 채 중국 땅을 헤매길 수차례 다니며 옷 가방을 나르다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아 목뼈엔 철심 6개가 나란히 박혀 있습니다.



아내 박 에스더(39)씨를 만난 것도 2000년 중국에서였습니다. 박씨는 "나는 인민군 여자 중대장이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밤낮을 안 가리고 한 달 동안 김일성 동상 앞을 지킨 열혈 당원이었다."이었습니다. 1999년 식량 부족으로 300만 명 안팎이 아사(餓死)한 '고난의 행군' 때, 과학자였던 박 씨의 아버지가 굶어 죽는 것을 보고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김 목사는 박 씨를 조선족 여성으로 위장해 한국에 입국시킨 뒤 자수하게 하여 박 씨와 결혼했고 2006년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부부는 천안 나사렛대학교 강의실을 빌려 탈북자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다 2007년 지금 자리로 이사 왔습니다. 김 목사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차에 태워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탈북자들이 중국에 있는 가족을 불러오기 위해 서류 작성하는 것을 도우며 한국 물정에 어두운 탈북자들과 함께 은행, 병원, 관공서도 숱하게 드나듭니다.



김 목사 교회의 수입원은 부인 박 씨가 북한 관련 강연을 해서 벌어오는 돈과 월 100만원 안팎의 소액 후원금입니다. 2002년 8월에 태어난 뇌성마비 아들은 작년 김 목사 부부가 후원자 될 사람을 만나고 밤늦게 귀가했는데 우유를 토한 것이 폐로 들어가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탈북자들을 도와야 하나…. 그렇지만 막다른 곳에 부딪혔다고 절망할 때마다 기적처럼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줬지요."



김 목사가 건물 주인으로부터 "사글세를 전세로 돌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지난 15일 반백의 중년 부부가 김 목사를 찾아와 안성에 사는 어느 독지가가 전한 것이라며 얇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김 목사는 '작은 정성'이겠거니 하고 감사 인사와 함께 봉투를 받았습니다. 김 목사가 이들을 배웅하고 봉투를 열자 6천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이 들어 있었다. 김 목사가 뛰쳐나갔지만 부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곳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탈북자 교인은 20여명이다. 교인 말고도 숱한 탈북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찾아 이곳에 옵니다. 김 목사는 그들에게 종교를 묻지 않습니다. 교회라기보다 '쉼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조선일보2009.04.17 참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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