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含閒 2022. 9. 14. 09:28
   

 

 

 

문윤홍 대기자              

 

9일부터 열흘간 추모기간 지낸 뒤 919일 국장(國葬), 장례식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서장례 전 4일간 일반 조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6·본명: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98일 오후(현지시간) 서거(逝去)했다. 향년 96. 1952 25세 나이로 즉위해 2022년 즉위 7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역대 최장수 군주이자 세계 최고령 및 최장수 통치자이기도 했다.

영국 왕실은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서거 당시 여왕의 곁에는 왕위 계승서열 1위인 장남 찰스 왕세자와 부인 커밀라, 왕위 계승서열 2위 윌리엄 왕세손 등이 곁에 있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날 오후 630분 버킹엄궁은 조기(弔旗)를 게양해 여왕의 서거를 알렸다. 찰스 왕세자는 즉시 왕위를 물려받아 찰스 3로 즉위했다.

여왕은 96일 차기 총리 내정자인 트러스 총리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밸모럴성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런던의 정궁(正宮) 버킹엄에서 차기 총리를 임명해온 관례를 처음으로 깬 것이다. 당시 왕실은 여왕이 일시적인 이동 문제가 있어 런던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고 밝혔으나, 다음 날 7일의 추밀원(樞密院: 국왕 자문기관) 온라인 회의까지 연기되면서 여왕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결국 8일 오후 버킹엄궁이 주치의들의 진찰 결과 여왕의 건강 상태가 우려되는 상태라고 발표하면서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날까지 만 70127일을 재위해 영국 군주 중에서 최장(最長), 세계 역사에서는 둘째로 오랫동안 통치한 군주로 남았다. 역사상 최장 재위 군주는 4세에 등극해 72년간 통치한 프랑스 루이 14세다. 20126월 엘리자베스 2세는 64년간 영국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 재위 60주년)를 맞았고, 20226월에는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 행사를 치렀다. 엘리자베스 2세는 2012년 즉위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왕은 20214월 남편 필립공의 별세 이후 급격히 쇠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해 10월 병원에 하루 입원했고, 이후 외부 활동을 자제해 왔다. 영국 왕실에 따르면 여왕은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찰스 왕세자를 비롯해 그의 부인 카밀리아 공작부인, 윌리엄 왕세손, 안나 공주 등 직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왕실은 여왕이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여왕의 장례식은 관례에 따라 열흘간 추모기간을 지낸 뒤 919일 국장(國葬)으로 치러진다.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여왕의 건강은 전날 급격히 악화됐다. 여왕은 96일까지만 해도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밸모럴성에서 정식 임명하는 등 공개 행보를 소화했다. 하지만 이후 영국 왕실은 7일 여왕의 추밀원 회의 일정을 돌연 취소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26, 아버지 조지 6세의 서거로 영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6개국이 가입한 영연방(英聯邦, Commonwealth of Nations)의 군주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에 과거 대영제국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그의 통치 영역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서거 때까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등 15(총인구 12900만명)의 국가 원수였고, 오늘날 지구상에서 2국 이상의 독립국을 다스렸던 유일한 군주였다.

여왕은 언제나 대중과 언론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찰스 왕세자 등 세 자녀의 이혼,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사망 등 갖가지 왕실 스캔들과 불운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밴 겸손함과 온화한 미소, 돋보이는 유머 감각, 철저한 자기 관리로 70여 년간 영국과 영연방 국민의 한결같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여왕은 찰스 3세와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등 31녀를 낳았고, 이들로부터 8명의 손자와 12명의 증손자를 얻었다.

15명 총리와 함께한 최장수 여왕가장 부유했지만 늘 검소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상징여성 지도자로서 탁월한 리더십필립떠난 뒤 건강악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프랑스어로 귀족이란 뜻의 nobless의무를 나타내는 oblige의 합성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상징이자 최장수 군주로 사랑받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일 때부터 무너져 가는 왕실의 중심을 바로잡고 여성 지도자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다.

완벽한 여왕으로서의 삶

1926421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부친 조지 6세가 왕위에 즉위한 10세 때 본격적으로 통치자 수업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대대로 왕의 여름 거처인 스코틀랜드 밸모럴성()과 윈저궁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스무 살 되던 1945년 조지 6세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밝힌 뒤 영국 여자국방군에 자원입대했다. 군번 ‘230873’을 달고 군용트럭 운전사로 복무했다. 이때 평생 반려자 필립 왕자를 만났다.

조지 6세의 건강이 악화된 1950년대 들어 엘리자베스는 왕실 행사를 대행했다. 1951 10월 캐나다, 미국 순방을 시작으로 영연방 국가를 순회하다가 이듬해 1월 조지 6세가 별세했다. 엘리자베스는 한동안 공적인 일에서 손을 놓고 부친을 애도하다 19536월 전세계 2500만 명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공식 명칭은 엘리자베스 2, 신의 가호 아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그리고 모든 소유지의 통치자, 영연방 수장이며 신앙의 옹호자’.즉위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은 무너졌으며 식민지들은 속속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영국 내부도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왕실의 존재에 깊은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왕실이 변하지 않으면 존속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는 영연방 국가들만이라도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 11월부터 6개월간 순방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순방은 영국 왕으로는 전례가 없었고, 인도에는 영국 군주로서 50년 만에 방문했다. 1977년 즉위 25주년에 35개국 영연방 지도자들이 축하연에 참석하는 결실을 얻었다. 1956년 총리 교체 시기에 보수당 해럴드 맥밀런을 차기 총리로 밀어붙이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자손 걱정 컸던 어머니

여왕으로는 완벽에 가까웠지만 끊임없이 스캔들에 연루된 자손 문제로 항상 고민이 컸다. 찰스 왕세자(74)는 다이애나 왕세자빈(1961~1997)과 결혼했다가 불화를 일으켜 이혼했다. 다이애나 빈이 1997년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은 찰스 왕세자를 원망했고 왕실 폐지론도 나왔다.딸 앤 공주(72)는 평민 필립 대위와 결혼했다가 파경을 맞았다. 자식 넷 중 에드워드 왕자를 빼면 모두 이혼 경험이 있다. 2019년에는 앤드루 왕자가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미국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이 소개한 10대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혹이 불거져 재판까지 받았다. 20203월에는 해리 왕손(38)과 메건 마클 왕손빈(41) 부부가 왕실과의 불화 끝에 결별하며 미국 캘리포니아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해리와 형 윌리엄 왕세손(40)형제 갈등도 불거졌다.이런 가족 문제에도 영국 사회에서 군주가 상징적 통치자 명맥을 잇는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덕분이었다. 그는 가장 부유한 여성에 속했지만, 검소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윈스턴 처칠부터 영국 총리 15명과 함께하며 신중하게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20214월에 74년간 해로(偕老)한 남편 필립 공이 100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나자 여왕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 여왕은 삶에 큰 구멍이 생겼다며 상실감을 드러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해리 왕손 부부의 왕실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인터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왕실 명성이 잠재적으로 손상을 입을 것을 염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겪은 공주님14살 때 국민연설, 18세엔 정비병 복무
현역 복무한 최초 왕실 여성 멤버2차 세계대전 시기 차량 정비병으로 복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청소년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겪었던 세대다. 공주 시절부터 독일 침공의 참상 속에서도 또래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미래의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젊은 나이에는 직접 일선 국방 의무를 수행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런던의 제국 전쟁박물관의 비키 호키스 큐레이터가 2021년 미국 뉴올리언스 2차대전 박물관 소식지에 기고한 글에서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2차 대전 시기 여왕의 삶을 소개했다.

19399월 전쟁이 터졌을 때 엘리자베스 공주는 13세였다. 당시 런던에 살던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은 독일의 공습을 피해 부모와 떨어져 대피를 했다. 공주 역시 동생 매거릿 공주와 함께 런던에서 30떨어진 윈저성으로 보내졌다. 당시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이런 식으로 대피했고, 2600여명은 호주·캐나다·뉴질랜드·남아프리카·미국 등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전쟁이 격화하던 19401013일 열 네살의 공주 엘리자베스는 윈저성에서 첫 대중연설을 가졌다. “이 나라에서 수천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떨어져 집을 떠나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새로운 환경에서 살고 계신 여러분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동시에 이들을 맞아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열 네살 공주의 또랑또랑한 연설이 BBC방송 어린이 시간을 통해 전국에 울려퍼졌다. 여왕이 영국 국민에게 차기 지도자로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연설은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혼란기 민심을 수습하려는 술책이라는 비판도 없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공습으로 공포와 혼란에 빠져있던 다수 영국인들에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황(戰況)이 격화하던 1943년에는 영국 정부가 식량난 타개를 위해 펼치던 승리를 위해 밭을 일굽시다(Dig For Victory)’에 앞장서 동참했다. 직접 윈저성에서 텃밭을 일구는 사진이 공개됐다. ‘승리를 위해 밭을 일굽시다캠페인은 전쟁 전까지 식량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해 먹던 영국인들이 독일 침공에 따른 공급선 붕괴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자 푸성귀 등을 텃밭에서 일궈 스스로 자급자족하자는 취지로 벌이던 계도운동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열 여섯살 생일에는 윈저성에서 열린 군() 행진을 처음으로 사열했고 열여덟살이던 1944년에는 영국군의 여성부대인 ATS(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입대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서른살이 되지 않은 미혼 여성에게도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고 직접 군에 입대하거나 군수산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이같은 정부 방침에 왕실도 솔선수범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19453군인엘리자베스가 배치된 곳은 군용차량 정비부대였다. 그곳에서 차량정비과정을 이수해 한 달만에 자격증을 땄다. 당시 언론들은 차량정비사 공주등의 제목으로 엘리자베스 공주의 복무 소식을 전했다. 직접 전장에서 총포를 쏘지는 않았지만, 고난의 시기에 왕위 계승 1순위자가 직접 국가를 위해 복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사기진작이 됐다는 평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려가던 194558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승전 축하 군중집회가 열렸을 때 엘리자베스 공주는 ATS 군복차림으로 조지6세 부부 및 동생 매거릿 공주, 윈스턴 처칠 총리와 함께 발코니에 섰다. 여왕은 즉위 후에는 서거 전까지 영국 및 여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영연방 국가들의 최고 군 지휘관 역할을 해왔다. 여왕은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한 최초의 여성 왕실 멤버, 2차 대전에서 복무한 유일하게 생존했던 현역 국가 원수라는 기록도 세웠다.

여왕은 1987년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지하에 영국군의 6.25 참전 기념비가 제막됐을 때 직접 참석해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렸다. 이 기념비는 201412월 템즈강변 인근에 참전기념비가 세워지기 전까지 런던 내 유일한 한국전 관련 추모시설이었다.

타고난 외교관생전 미국 대통령 13명 만난 엘리자베스 2
왕세녀 때부터 대미외교 전면에70년간 트루먼부터 바이든까지 만나클린턴 태어날 때부터 외교관

98(현지시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70년간의 여왕 재위 기간 등을 통틀어 미국 대통령만 13명 만났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격동의 20세기와 21세기 초까지 여왕이 전면에 나선 대미 외교는 영·(英美) 관계는 물론 국제정치 역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왕은 1951년 왕세녀 신분일 때 미국 백악관을 찾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면담한 이래, 마지막으로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총 13명의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유일하게 여왕을 만나지 않은 이는 1960년대 린든 존슨 전 대통령 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미 외교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이런 모습은 세계에 영국 소프트파워 외교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엘리자베스는 여왕 즉위 후 자신을 처음으로 미국에 국빈 초청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과는 자신만의 요리법을 알려주는 사적인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했다고 한다. BBC에 따르면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여왕을 유독 여러 번 만났는데, 자신의 딸을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에게 시집 보내고 싶어해서였다고 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대 미국은 영국 대처 내각과 같은 보수 정부로 최고의 관계를 구가했다. 이 시기 여왕 역시 레이건 부부와 승마 취미를 고리로 친구처럼 지냈다.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방미(訪美)한 여왕을 생애 처음 야구장으로 초청해 미국 대중 스포츠를 여왕이 관람하는 모습을 연출토록 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여왕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성공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인 사람 같았다고 했다.

여왕은 30대 때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동년배인 재클린 케네디와 1961년 처음 만났을 땐 그의 인기에 눌려 조명을 받지 못해 당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는 왕의 몸을 만지면 안 된다는 예법을 모르고 여왕의 팔을 잡고 등을 쓰다듬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왕 앞을 가로질러 가거나 그 앞에서 등을 돌려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가장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16월 영국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런던 버킹엄궁을 방문, 당시 남편 필립공을 여읜 지 두달 밖에 안된 여왕과 회담했다. 세계 정상 중 동년배조차 찾기 힘든 바이든 대통령은 17세 연상의 여왕을 만난 뒤 그의 외모와 너그러움이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면서, 백악관에 초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끔찍한 잘생김" 13공주가 몰락 왕족 필립공에 빠진 순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릴리벳'으로 불리던 공주 시절, 영국 왕립 해군대학 사관후보생이자 몰락한 그리스 왕족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여왕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70년 가까이 국서(國壻) 자리를 지킨 필립공(에딘버러 공작)202149(현지시간)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영국 언론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일제히 조명했다.

굴곡 없는 영국 공주와 비운의 그리스 왕자의 만남

2021410(현지시간) 미국의 타임(TIME)’지는 "13세의 엉뚱한 소녀였던 릴리벳(엘리자베스 2)""18세의 끔찍할 정도로 잘생긴 해군 장교"에게 푹 빠진 과정을 소개했다. 그리스 왕자였던 필립공()은 가난하게 자랐지만, 특유의 남성적 매력과 호방한 성격, 출중한 외모로 여성들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필립공의 어린 시절은 불운으로 점철됐다. 1921년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그리스왕 콘스탄틴1세의 조카이자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내 군주제가 전복돼 온 가족이 강제 추방됐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후손이기도 한 어머니 앨리스 공녀는 망명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프랑스 남부로 도망간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1935년 그리스 군주제는 다시 복원됐지만 불안정했다. 이 시기 필립공은 영국 스코틀랜드 기숙학교인 고든스턴에서 수학하며 마음을 다잡아 나갔다. 하지만 1937년 누이 세실이 만삭인 채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또 한차례 시련을 겪었다.



이후 필립공은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1939년 해군에 입대했다. 릴리벳 공주를 처음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해군학교에서 최고 생도로 뽑힌 그는 학교를 방문한 릴리벳 공주를 안내했다. 수많은 비극을 극복하고, 해군으로서의 삶을 앞두고 있었다.

영국 해군서 승승장구

필립공은 해군이 체질에 맞았다. 21세의 나이에 영국 해군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갑판사관이자 구축함 월리스의 제2 지휘관이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지중해와 태평양에서 각각 시칠리섬 상륙작전, 영국군 구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타임지는 필립공이 구축함 웰프를 타고 태평양에 파견됐을 당시 그를 본 호주 여성들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우리는 모두 완전히 그에게 미쳐있었다", "그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등이 20대의 필립공을 본 호주 여성들의 반응이었다. 그 시기 릴리벳 공주의 방에도 필립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있었다고 한다.

릴리벳 공주는 참전 중인 필립에게 종종 편지를 썼고 드물게라도 답장이 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몰래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졌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조지 6세의 우려와 만류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194711, 릴리벳 공주가 20, 필립공이 25세일 때다. 필립공은 왕실의 일원이 되면서 필립 윈저-마운트배튼, 에딘버러 공작이 됐다.


"자식에게 못 물려주는 영국 유일의 남자

결혼을 결정한 순간부터 필립공의 삶은 '포기'의 연속이었다. 우선 그리스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삼촌과 그의 대부를 따라 성()도 영국식인 마운트배튼으로 정했다.
애착을 가졌던 해군 경력도 일찍 포기해야 했다. 2차 대전을 치르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쇠약해진 조지 6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다. 릴리벳이 1952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 필립공은 여왕의 대관식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때부터 필립공의 직업은 해군이 아닌 '여왕의 남자'가 됐다.

조지 6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뒤 두 사람을 걱정했다고 한다. 남성적 기질의 필립이 너무 젊은 나이인 30세에 그동안 쌓은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여왕의 그림자로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실제 필립공은 즉위 초기 엘리자베스 2세와 많은 일로 다퉜다. 엘리자베스 2세와 자식들의 성()에서 '마운트배튼'이 사라지는 일부터, 쏟아지는 행사와 의무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여왕의 남자로 행동해야 하는 일 등이 짜증으로 쌓인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 나라에서 자식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는 유일한 남자"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조지 6세는 생전 엘리자베스 2세에게 "필립은 뱃사람 같은 사람이다. 한 번씩 파도를 탈 때도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설화를 빚기도 했지만, 그는 70년 넘게 여왕의 곁을 지키며 의무를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리스 왕실의 몰락을 지켜본 탓에 영국 왕실의 현대화를 위해 애썼다. 무수한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2017년 한 행사에 참석한 필립공은 자신을 두고 "여러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를 보게 될 것"이라는 농담을 남겼다.

여왕 서거에 전세계 애도 물결불 꺼진 에펠탑, 조기 게양한 백악관
대통령, “국민께 깊은 애도국장도 참석바이든 타의 추종 불허하는 존엄한 지도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98(현지시각) 서거하자 전세계에서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이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장(國葬)에 참석한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911윤 대통령이 오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질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국장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9일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소식에 영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트위터에 영어로 올린 추모글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명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존엄성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여왕의 친절한 마음과 선행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애도를 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군주 이상이었다그는 시대를 규정했다고 했다. 이어 지속적인 변화의 시대에 여왕은 영국인에게 안정과 자존심의 지속적 원천이었다전 세계인이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유대를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영국 군주였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1982년 엘리자베스2 세 여왕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9·11 사태 이후 암울했던 시기에 미국 편에 서서 슬픔은 우리가 사랑에 지불하는 대가라는 사실을 깨우쳐줬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백악관을 비롯해 군부대와 공공장소 등에 조기(弔旗)를 게양하도록 지시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의회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프랑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여왕이 70년 넘게 영국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구현했다그를 프랑스의 친구이자, 영국과 한 세기에 길이 남을 인상을 남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왕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은 이날 오후부터 경의의 의미로 에펠탑 조명을 끄겠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영국 왕실에 조전(弔電)을 보내 "수십 년간 여왕은 세계의 권위뿐만 아니라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어렵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직면한 이들이 용기로 이겨내길 바란다"고 조의를 표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