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고교국어교과서에 실린 詩, 綠草晴江上를 쓴 徐益의 유적을 다녀와서

含閒 2013. 10. 22. 11:09

 

 

 

 

                            萬竹 徐益과 杏林書院

 

 

충남 논산 일원에는 윤증의 고택 등 양반의 고향답게 문화재가 많은데,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 [녹초청강상(綠草晴江上)]를 지은 서익의 고향이기도 하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는 몇 수 밖에 없다.

서익은 부여서씨인데,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조선 세조때 예산현감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익(徐益, 1542~1587)이다. 서익은 호가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이며 1569년(선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1583년 군수(郡守)가 되고 이어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순문관(巡問官)이 되어 북방에 파견되었다.

서익은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는 등 군사 방면에서 다양한 건의를 하기도 하였다.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논산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그루를 심고 만죽정(혹은 세실정)을 지었다. 그의 자손들은 현달하여 은진현의 중심 사족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집성촌에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시 2수가 전해진다. 은진(恩津) 갈산사(葛山祠)에 배향되었다가 1867년(고종 4)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서원(杏林書院)으로 옮겨 배향되었다.

그의 유명한 시, 녹초청강상(綠草晴江上)는 다음과 같다.

녹초청강상(綠草晴江上)에 구레 버슨 말이 되야

때때로 머리 드러 북향(北向)하여 우는 뜻은

석양(夕陽)이 재너머 가매 님자 그려 우노라.

이를 현대어 풀이하면,
푸른 풀이 우거진 맑은 강가에서 굴레를 벗어 버린 말이 되어
가끔 머리를 들어 북쪽을 향하여 우는 뜻은
석양이 고개를 넘어 가기에 문득 임(임금)이 그리워 우는 것이노라

이 시는 지은이 서익이 그가 죽기전 의주 목사에 올라와 있을 때, 율곡 이이의 탄핵을 변호하다가 파직당하여 고향인 충청도에 내려가 있을 즈음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굴레버슨 말이'란 벼슬에서 밀려난 자신을 동물에 비유하고, '북항하야 우는 뜻은'은 애틋한 충성심을, 또 '석양에 재 넘어감애 님자 글여 우는'은 말의 생활 습관에 비추어 중종의 승하함을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비 갠뒤의 풀이 퍼렇게 우거진 강가에 유유히 풀을 뜯는 굴레 벗은 말과도 같이 벼슬자리를 물러난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때때로 고개를 들어 임금 계신 곳을 향하여 우는 까닭은 나이가 들어 점점 늙어가매, 임금이 그리워서 우는 것을 표현했다.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에 세워진 부여서씨의 문중 서원으로, 육곡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부여서씨들의 상징적 유물이기도 하다.

행림서원의 전신은 강응정(姜應貞)이 독향되어 있던 갈산사(葛山祠)였다. 갈산사는 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던 사우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을 1713년(숙종 39) 우암 송시열이 중건을 주창해 산노리로 이전,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이후 효암서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1734년(영조 10)에 서익이 효암서원에 제향된 것으로 추측된다. 효암서원에 제향되어 있던 서익은 1856년 효암서원에 김성휘가 추배되면서 위차(位次)로 인한 갈등을 겪게 되었고, 이런 갈등 속에 부여서씨 집안에서 육곡리에 행림서원을 건립하고 위패를 가져오게 된다.

현재 행림서원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행림서원에서는 서원지를 근거로 1856년(철종 7) 김성휘가 효암서원에 추배되던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차 문제로 인한 서원 건립은 결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1867년(고종 4)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근래 발견된 자료들이 대부분 1867년으로 적고 있어 이 해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그러나 행림서원은 건립된 지 얼마 있지 않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다. 이후 육곡리에 세거하는 서익 후손들의 공론으로 1926년 복설되었으며, 1932년부터 본격적인 위엄을 갖추었다. 1976년에 도애 이소를 추배하였다.

현재 행림서원 경내에는 만죽선생 묘정비와 행림서원 기적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만죽선생 묘정비는 1867년(고종 4)에 건립된 것이다. 송내희가 찬(撰)하였으며 이호준이 전(篆)하였다. 만죽선생 묘정비의 앞면에는 ‘만죽서선생묘정비(萬竹徐先生廟庭碑)’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부여서씨의 육곡리 입향 과정 및 효암서원에서 서익이 분봉되는 과정을 적은 글이 음각되어 있다.





행림서원에서는 매년 3월 그믐과 9월 그믐 논산 지역에 사는 유림들이 참여해 만죽헌 서익(徐益)을 주향하고 도애 이소(李韶)를 배향하고 있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여서씨 종중에서 관리∙보호하고 있다.

행림서원이 자리한 육곡리는 부여서씨의 동족마을이다. 이러한 부여서씨가 자신들의 입지와 양반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해 문중서원을 건립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부여서씨가 주변 지역에서 양반가로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익'이 병조정랑 시 이순신과 얽힌 일화가 있다.

[신이 처음 종 9품으로 관직을 지낸 함경도 동구비보에서 함경감사 이후백의 신임을 받으며 3년 복무하고 나서 간곳이 한성 훈련원 봉사였습니다.

35세였고 한성 훈련원 봉사는 종 8품인데, 이때 직속상관인 정 5품의 병조정랑 서익이 '청탁'을 하였습니다.

청탁 내용인지 자신의 친지 1명을 참군(정 7품)으로 승진시켜달라는 것인데, "아래 있는 자를 까닭 없이 끌어올리면 당연히 승진되어야 할 사람이 천거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라고 대놓고 반발하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서익은 앙심을 품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이 충무공은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겠다는 말은 이때 나옵니다.)

3년뒤인 1582년 발포수군 만호시절 '서익' 이 변방의 군기물을 감찰하는 군기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군기물 감찰 결과를 거짓으로 올리고 이 충무공은 처음으로 '파면' 이 됩니다.

아무튼 이 파면으로 집에서 몇개월 지내다 다시 한성 훈련원 봉사로 복귀합니다. 강등된 인사조치인데도 별 불평없이 열심히 복무했습니다. 이때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같은 덕수 이씨라고 만나보고 싶단 뜻을 류성룡에게 전하고 류성룡도 이순신의 입신을 위해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나와 율곡은 같은 덕수 문중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 만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안 만납니다.]

또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당시는 관리들은 누구나 처첩울 거느렸고 고향에는 본처인 향처(鄕妻), 서울에는 소실인 경처(京妻)를 거느렸는데, 이 관습이 자유당 때까지 내려와 군수만 되도 소실이 있었고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시에 능한 여인이야 이따금 있었지만 글씨로 이름난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앙엽기(盎葉記)4》를 보면 부여서씨 만죽(萬竹) 서익(徐益)의 소실이 글씨를 잘 썼다고 적혀있다. 칠서의 옥사 사건에 연루된 서양갑(徐羊甲)’이 서익의 서자이다.

'칠서의 옥사사건'이란 전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출 허홍인 등 권력가의 서얼출신 7명이 서자출신으로 왕이 된 광해군에게 서얼(庶孼)차별 법을 고쳐달라고 상소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작당을 하고 의적 흉내를 냈다.

때마침 생각이 비슷한 신분개혁세력인 허균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이라고 중국 무술영화에나 나오는 이름을 붙이며 여주근처에 움막을 짓고 무륜당(無倫堂)이라 부르면서 본격적으로 의적(도적) 행세를 하였다. 무륜당이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으로 즉 신분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의식과 사상은 허균 일당이 가르친 것이다. 허균은 신분차별의 나쁜 것만 분별 할 줄 알았지 강도질이 나쁜 것은 눈을 감아 버렸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상민과 천민들을 계몽하기 위해서 한글로 쓴 이야기책인데 중국소설 《수호전》을 번역하여 가미한 것이다. 이들은 윤리가 없으니 참으로 편했다. 신분도 없고 위아래도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자기들 잣대로만 판단하여 도적질을 하고도 일부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탐관오리들 것을 원래주인인 백성들에게 나누워 주었는데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쓴 재물은 최소의 경비 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칭 ‘죽림칠현’ 또는 자칭 ‘의적’ 인 이들은 차츰 도적떼가 되어가고 있었다. 허균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작품들이었다. 이들이 어느 날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장사꾼)을 죽이고 강도질을 하였는데 죽은 상인의 노비가 도망쳐 이들을 고변하여 포도청으로 잡혀왔다. 포도대장 한희길이 이이첨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이이첨이 대북파의 심복들과 모의하여 이 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둔갑시켜 영창대군을 제거시킬 계략을 꾸미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영창대군은 죽게 된다.



餘滴으로 한 마디 보태고자 한다.

이곳은 탑정호(塔亭湖)를 끼고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답워 논산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탑정호는 손자를 데리고 가 보면 '할아버지. 여기는 바다가 아니예요?'할 정도로 넓다.

논산시 부적면, 가야곡, 양촌면 일원에 위치한 탑정호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잉어,쏘가리,메기등 담수어족이 풍부하고, 논산8경 중 제2경에 속하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탑정호와 주변 농경지가 제공하는 풍부한 먹이로 철새들의 충분한 서식조건을 갖추고 있어 겨울 철새들의 낙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201호 흰 큰고니, 천연기념물 327호 원앙이, 구제보호조인 가창오리, 고방오리, 알락오리, 쇠오리등 4만여마리가 점점이 호수를 채색하고 있다.

수문을 지나 약 200m 호수를 따라 나있는 차로를 따라가다 보면, 음식점과 카페가 자리 잡고 있어 찾는이로 하여금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또 이곳은 수면이 도로 가까이 올라 올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계곡을 이루던 주변 산세가 호수면으로 뻗어 다도해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淸閑


                                                                               

                                                                   황성 옛터 / 앨토 색소폰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淸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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