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스크랩(報紙剪貼)

어려운 길 택한 26살…“좋은 게 좋은 건 싫었다”

含閒 2009. 7. 31. 20:42

어려운 길 택한 26살…“좋은 게 좋은 건 싫었다”

[한겨레]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휴직' 이세돌 9단 단독 인터뷰

한국 바둑 일인자 이세돌(26) 9단은 올해 반상의 뉴스 메이커였다. 한국 리그 불참선언(4월22일)에 이은 프로 기사회의 이세돌에 대한 조처 필요 결정(5월26일)→1년6개월 휴직계 맞대응(6월8일)→불붙은 일인자 논쟁과 바둑계의 찬반 양립→이세돌 기자회견(6월30일)→이사회의 자숙 결정(7월2일)까지 한달 새 10년 동안 일어날까 말까 한 논란이 일었다. 당사자인 이세돌은 홀로 거대한 파도와 맞섰는데, 보는 이에 따라서 시각도 제각각이었다. 바둑계의 거목 조훈현 9단은 "일인자는 일인자다워야 한다"며 이세돌을 비판했고, 기사회 회장을 역임한 한철균 7단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세돌을 옹호했다. '독불장군'부터 '지못미'에 이르는 다양한 시선처럼 '이세돌 파동'의 심층은 단일하지 않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갈등 국면에서도 사람들의 희망은 하나로 모아졌다. 그의 천재성만큼은 죽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도 할 말이 많아서일까? 언론 접촉을 극도로 꺼려온 이세돌이 파동 이후 처음으로 < 한겨레 > 와 만나 최근의 심경을 밝혔다. 인터뷰는 서울 마장동 이세돌 바둑교실에서 2시간 동안 이뤄졌다.

좋은 바둑 둘 수 없을 것 같아 쉬는 것뿐
돌아와도 국내보단 국제기전 주력할 것
일인자라 해도 아직 전성기는 오지않아
이창호는 나보다 '한수 위' 구리는 '맞수'


-바둑은 무엇인가? 바둑판을 앞에 두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드는가?

"바둑은 창작을 하는 것이다. 초반 20수 정도의 포석까지는 서로 비슷한 모양이 많이 나오지만 나머지는 만들고 창조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도화지를 앞에 두고 있는 심정과 같다. 기분에 따라 막막할 때도 있지만 자신있고 신나게 두고 싶을 때도 있다. 조각, 그림, 미술,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1개월간 한국랭킹 1위를 유지한 일인자다. 그런데 늘 이창호 9단이 낫다고 하는데 진심인가?

"기록이나 실력, 기보를 봤을 때 아직 이창호 사범님을 넘지 못한다. 최근에 체력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컨디션이 안 좋아 준우승을 많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최고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이 사범님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내가 최고'라고 말할 것이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기보를 무척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기보는 한 기사가 걸어온 행로다. 100판을 싸워 이겨도 어떤 기보를 남기면서 이겼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가끔 내 기보를 보고싶을 때가 있어 바둑연감을 들춰본다. 그러면 몇 년 전 기보라도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두었을까. 이게 내 단점이었구나, 지금은 어떤가' 비교하면서 다시 배운다. 자기 바둑을 놔보는 게 남과 바둑 놓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떠오른 게 이세돌 9단의 기보저작권 위임 거부였다. 한국기원과 기사회는 자체사업 기반을 만들기 위해 237명의 프로기사들한테서 기보저작권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이세돌 9단은 홀로 사인을 하지 않았다. 기보저작권의 한 축인 개인 기사들의 권리가 명확하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전체(기사회)를 위하는 일에 개인 이익을 앞세운다는 것은 비난받기 쉽다. 기보저작권 사업이 이뤄져도 얼마나 큰 돈이 개인한테 돌아올지도 불확실하다. 이세돌 개인과 조직의 마찰은 중국리그 출전 상금 5% 기사회 납부 거부, 바둑판 사인 거부 등에서도 일어났다. 이세돌은 돈을 생각하는가?

-1년6개월간 휴직했다. 금전적으로 큰 손해 아닌가?

"각종 기전에 참가하지 못해 큰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이야 젊기 때문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휴직을 한 것은 기분이 안 좋아서가 아니다. 제대로 둘 수 없을 것 같아서, 좋은 기보를 남길 수 없을 것 같아 휴직한 것이다."

-기보저작권 등의 문제에서 자기 고집도 중요하지만 동료 기사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때로는 양보도 해야 하지 않는가?

"(웃음) 글쎄, 나도 때로는 '참 바보같이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바둑에서도 쉬운 길이 있고, 어려운 길이 있는데 자꾸 어려운 길을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사는 것도 내 나이에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은 아니지만,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시상식에 참가하거나 바둑판에 사인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시상식에 불참한 일이 한 번 있었는데 두고두고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팬과 스폰서에 정말 죄송하다. 사인도 그동안 잘해주었다. 그러나 바둑판 사인은 조금 다르다. 내 사인이 누구한테 가는지, 사인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미리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다."

바둑계 사인의 70% 이상은 바둑판 사인이다. 유명 기사의 사인이 있는 바둑판이 때로 억대에 팔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인의 가치는 99% 이상 소장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지 현실의 교환가치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세돌 9단의 사인 결벽증은 '남발하고 싶지 않다'는 지나친 깔끔 떨기로 보인다. 중국리그 출전 상금의 5%를 납부하는 것을 거부한 것도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기원이 해주는 것도 없이 받기만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이세돌의 까탈스러움이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세돌은 온갖 불만을 표내지 않고 20년 동안 일인자로 버텨온 이창호 9단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천재다.

-매우 공격적인 바둑인데 성격도 그런 편인가?

"자기 스타일에 맞게 둘 뿐이지 성격이 그런 것은 아니다. 공격형 바둑을 둘 때도 있지만 침착하게 싸우기도 한다. 공격적이면 보는 사람은 편하지만,프로 바둑에서는 한 집을 두고 싸운 잔잔한 바둑도 묘미가 있다. 그러나 팬들은 대마잡기 등 공격형을 좋아하는 것 같다."

-구리 9단과 세계바둑을 양분하는 라이벌인데?

"구리와는 동갑인데 바둑 두는 게 즐겁다. 바둑 스타일도 화끈하다. 평소 있을 때도 호방한 모습이어서 좋다. 둘이 맞붙으면 기세와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본다. 현재는 5 대 5다. 꼭 대결하고 싶은 인물로는 이창호 사범님도 있지만 아무래도 국내 기사이고, 가장 이기고 싶은 인물은 구리다.

-팬들은 이세돌 9단의 빠른 복귀를 바라고 있는데?

"지금 복귀를 논하는 것은 이르다.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돌아올 것이다. 5살부터 20년간 배운 것이 바둑이다. 입단 14년 동안 전부를 투자했다.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돌아오더라도 국내기전보다는 일단 국제기전에 주력할 것이다."

이세돌은 휴직 기간 조깅이나 등산 등 운동도 하고 중국어도 배울 계획이다. 1주에 2번 정도는 교실에 나오고 있는데,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이세돌은 지난해 100국을 두었다. 한 판 두는 데 평균 2~3㎏이 빠진다고 하니 심신은 지쳤다. 올해는 9월 시작되는 중국리그에서 7~8판만 두면 마감을 한다. 승부사에서 생활인으로 돌아와 갖게 된 여유는 훨씬 많아진 셈이다.

-결혼을 비교적 일찍했는데?

"23살에 했다. 옆에서 챙겨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특히 바둑에 졌을 때 큰 도움을 받는다. 혼자 있는 것보다 아이와 아내가 있으면 훨씬 위로가 된다."

-술이 매우 센 것으로 알려졌는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술은 일주일에 1~2차례 먹는데 소주 1병이 적정한 주량이다. 담배는 5~10개비를 피우는데 계기가 있으면 끊을 것이다. 잘 먹고 푹 자는 게 몸 상태 조절에는 최고인 것 같다. 대국할 때는 밥을 잘 먹지 못한다."

-지금이 전성기인데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지금이 내 전성기라고 한다면 아쉽다. 결과는 두고 봐야 하지만 아직 내 전성기는 아니다. 더 발전하고 더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에서 본 이세돌은 긴장하고 때로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동료 기사들의 '탄핵'에 가까운 조처필요 결정에 26살 청년이 입었을 마음의 상처가 컸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세돌은 바둑판의 개혁을 내건 투사도 아니고, 돈을 따지는 속물도 아니었다. 흔히 천재는 시대와 잘 화합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세돌 또한 개성이 강한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가 좀더 통 큰 호방형 인간으로 달라지기를 바라는 게 팬들의 심정이라면, '날 이렇게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게 이세돌의 속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알 장난감 삼아…5살 때부터 '쎈돌'

이세돌은 홀로 완성되지 않았다. 아마 4단 정도 실력의 아버지 이수호(1998년 작고)씨는 이세돌이 만 5살 되던 때부터 바둑을 가르쳤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는 동네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아들은 순식간에 아버지를 추월했고, 9살 때 서울로 올라와 권갑용 도장에 들어간다. 권갑용 7단은 "너무 천재적인 아이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다"고 회상했다. 권 7단은 "평범 속에 넣으면 비범함이 사라질까봐 가르치는 데 신경을 썼다"고 했다. 권갑용 사범 외에 김영환 9단, 박승문 6단, 박성수 4단, 김찬우 5단 등이 바둑을 지도하며 이세돌을 키웠다.

하지만 형 이상훈 7단의 역할이 특히 컸다. 이세돌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지만 오늘날 내가 있기에는 형의 도움이 절반 이상이 될 정도"라고 했다. 형 이상훈은 애초 동생의 바둑 입문을 반대했다. 그는 "프로에 입문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동생은 이 길을 따라오지 말고 공부를 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서울 권갑용 도장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동료이자 사범으로서 이세돌의 재기를 다듬어 주었다. 형은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이세돌 바둑교실을 내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이세돌의 국외 대국 때 수행을 하거나, 국내 기자회견 조율, 각종 기전 준비를 해주는 등 에이전트 구실을 한다.

비금도의 아름다운 자연도 이세돌의 정서를 구성하는 한 요소다. 어린 시절 기억은 오래 남는다. 바닷가에서 자란 이세돌은 생선회와 매운탕, 숯불구이 등을 좋아한다. 이세돌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비금도 중학교에 적을 두었지만, 프로 기사의 길을 가기 위해 졸업은 포기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고향에 홀로 있는 어머니를 잘 찾아보지도 못했다. 그는 "올여름에는 한번 가볼 것이다. 처음에 태어났듯이 언젠가 노년에 가서 살고 싶은 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