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동출신 대문호(大文豪) 정공채 시인을 기리며
[기고] 하동출신 대문호(大文豪) 정공채 시인을 기리며
- 기자명경남=손승모 기자
- 입력 2025.04.22 11:51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오는 4월30일은 정공채 시인이 꽃비를 맞으면서 파촉 3만리로 떠난지 17주기가 되는 기일(忌日)이다.
하동문학공화국의 제1호 공민권을 부여받은 한국문단의 대문호 정공채(鄭孔采1934~2008)시인.
평생을 고향 하동의 산,강,바다를 그리워했다. 그의 시어(詩語)에는 한국인의 원형적 심상이 미학으로 녹아있다. 정시인은 일제강점기 1934년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星坪里) 금오산자락 하동 정씨 집성촌에서 종손으로 태어났다. 유학자인 조부는 공자를 닮아라해서 큰아들을 공채라 이름지었고, 동생은 당나라 시인 두보를 닮으라는 뜻으로 두채라 이름지었다.
필자는 정시인이 파촉 삼만리로 떠나기 직전인 2008년 3월 경기도 일산 암병원에 문병을 갔을 때 모습을 잊을수가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서 반갑게 손을 잡으면서 “현암, 하동에서 먼길왔네”. 눈가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흘렀다. 그것이 정시인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한국문단의 노거수와 같았던 시인은 한달 후 그토록 그리던 고향 하동 금오산자락아래 술상포구 파란 바다를 보면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시대 위대한 시인이었던 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부디 서역 삼만리에서도 시인이여 영원하라 시인만세 시인만세 하소서!

정공채 시인과의 첫인연은 1984년 가을이다. 박경용 시인과 박춘근 수필가의 소개로 서울 인사동 맥주집 ‘순풍에 돛달고’에서 였다. 첫인상이 지리산과 섬진강, 한려수도를 다 품은 넉넉한 군자의 풍모였다. 그후 필자가 상경할때마다 문인들의 살롱이었던 ‘소문난 집’에서 시향(詩香)이 그윽히 풍기는 대화를 나눴다.
1986년 늦봄 당시 하동세무서장으로 재직하던 진의장(서양화가)화백이 하동지역의 청소년 시낭송회를 소년한국일보와 함께 개최했다. 심사위원으로 하동출신 정공채시인과 소년한국일보 김수남사장을 초청했다.
시낭송회가 끝나고 저녁에 필자의 도방인 진교면 사기마을 새미골에서 뒷풀이 시낭송회가 열였다.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창공에 빛나는 별빛을 조명삼아 정공채, 김수남, 진의장, 김성우(한국일보 주필), 최정간등이 밤새도록 주옥같은 한국명시들을 줄줄이 낭송하였다. 이자리에서 5인은 시의날 제정에 의기투합했다.
1년간의 행사준비 끝에 1987년 11월1일 시의날이 제정되고 행사는 저녁시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시단의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김춘수 등 원로시인들이 총망라되어 참석한 한국 시문학의 위대한 시인들의 잔치였다. 원로시인들은 매우 감격스러워 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김남조 시인이 시의 날 제정을 축하하기 위해 쓴 자작시 “시인만세”를 류량(嚠喨)하게 읊었다. 객석의 모든 시인들은 환호하였다. 행사를 마친후 김남조, 정공채, 박재삼, 박희진, 신세훈, 성춘복, 허영자, 신달자 시인들과 함께 인근 맥주집에서 그동안의 노고를 서로 치하했다.

정시인은 1987년 11월1일 시의날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필자에게 찬새미골가란 시를 한수 지어주었다. 이 시는 1989년 10월 정공채 시집 ‘사람소리’(도서출판 평야)에 발표하였다. 시집 ‘사람소리’는 지금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정시인의 집안 조카이자 서울에서 ICT기업을 경영하는 씨스존 정찬원 대표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하마터면 사라질뻔했던 찬새미골가를 다시 찾는 기쁨을 가졌다.
정찬원 대표는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출신으로 ‘하동정씨’ 집안 어르신 중에 정공채 시인과 정두수 작사가 두 분이 계신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평소 시를 즐겨 낭송하는 정대표는 기회가 된다면 두 어르신들의 현창사업을 지역주민들과 의논하여 함께 했으면하는 바램도 내비쳤다.